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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2002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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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


진흙 속에서 피어 불꽃같이 지다

글 사진/김정동(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영관을 쓴 여류들

내가 처음 나혜석에 관심을 갖은 것은 1974년이었다. 이구열(李龜烈)의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동화출판공사, 1974)라는 책을 봤기 때문이다. 또한 <나혜석 전>을 본 것은 1974년 6월 경이었다. 퇴계로 극동 사옥 부근 ‘아름화랑’에서 그녀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1974.6.15-22).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한국이 처음 낳은 여류 서양화가이며 현대 여성의 선각자인 정월 나혜석 여사…”15개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풍경 서울’이 제일 관심이 갔던 기억이 있다. 금년 정초 동료 교수 한 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얼마 전에는 그의 49제가 예산 수덕사에서 열려 새벽길을 달려갔다. 그 교수의 누님이 수덕사의 이월송(李月松) 스님이셨기에 그 일을 그곳에서 주관한 것이다.

나는 수덕사에서 많은 연을 느끼고 있었다. 그 공간에는 일엽(一葉) 스님도 있었다. 마침 때맞춰서랄까 월송 스님은 <일엽선문(一葉禪文)>이란 아름다운 책을 펴냈다. 나도 행으로 그 책을 하나 받아 들게 되었다. 일엽 스님과 수덕사 그리고 나혜석, 김활란 등 기라성 같은 여류의 이름들이 그 속에 열거되고 있었다. 김팔봉(金八峰)은 1920년대 우리 나라의 신여성은 20여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중 세 명이 여기 있었다.

나는 수덕사를 빠져 나오는 길에 나혜석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었다. 일엽 스님은 ‘진흙 속에 핀 꽃 나혜석을 말한다’라는 글로 나혜석을 그린 바 있어 수덕사의 어딘가에 나혜석이 담겨 있을 것만 같았다.

나혜석(1896-1948)과 일엽(1896-1971), 그리고 윤심덕(1897-1926)은 여류들이다. 나혜석과 일엽은 동년배이고 윤심덕은 한 살 밑이다. 그들은 1900년대 초 혜성과 같이 이 땅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나혜석(羅蕙錫)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新豊里) 291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신풍동 45-1, 45-4, 45-5, 49번지 일대이다. 나주 나씨 나기정(羅基貞)의 큰 대문의 오랜 기와집에서였다. 어머니 최시의(崔是議)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나명순(羅明順)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09년에는 시흥 군수를 그리고 1912년에는 용인 군수로 있었다.

큰 오빠 나홍석(羅弘錫)의 집은 수원면 남창리 55번지였다. 그녀는 그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큰오빠는 1909년 이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로부터 신교육에 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화가의 길로 나가다

1913년 3월 17세가 되던 해 그녀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오빠가 후원했다.

작은오빠 나경석(羅景錫, 1890-1959)은 1910년 일본에 건너 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1914년 7월 동경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현재의 동경공업대학이다. 경석이 추천한 학교가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학교’였다. 한국근대사 연구가 가미야 니지(神谷丹路)에 의하면 이 학교는 1900년 설립 인가된 학교로, 1913년 당시는 혼고(本鄕) 기구사카(菊坂)에 있었다. 1930년 ‘여자미술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뀐다.‘전문’자가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1949년부터는 4년제 ‘여자미술대학’이 되었다. 현재의 학교 위치는 가나가와 현(神奈川縣) 오다큐(小田急)의 사가미오노(相模大野)이다.

그녀는 유화과에 들어갔는데 이는 오늘의 서양화과였다. 먼저 선과(選科)에 들어가 1년을 지낸 후 사범과에 입학했다. 선과는 외지인을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코스였다. 그녀의 지도교수는 고바야시 만고(小林万吾, 1870-1947)였다. 고바야시는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후에 동경미술학교 교수가 되는 이름 있는 화가였다. 인명 사전에 등장할 정도이다.

6년간의 도쿄 생활

정월이 도쿄에 유학할 때 국내에서 그녀는 큰 관심거리였다. <매일신보>(1914.4.7)에는 ‘동경 학교의 조선 규수(閨秀)’라는 보도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작은오빠 덕으로 그녀는 비교적 유복한 유학생활을 한다. 그녀는 하숙집 주인 딸과도 친하게 지내며 동경에 살고 있는 청년 화가 사토우 야타(佐藤彌太)와 만나기도 한다. ‘머리가 덥수룩하고 키가 짤막한 청년’이라고 했다. 그 일본 청년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학교 기숙사까지 쫓아 다녔고, 그녀에게 죽자 살자고 피스톨을 내밀 정도였다고 한다. “당신더러 일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조선 사람이 되겠어요.” 그가 쓴 글이 <시라카바(白樺)> 잡지에 ‘R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그 즈음 그녀는 오모리(大森)에서 자취 생활을 했다. 학교는 성선(省線)으로 통학했다.

1915년 4월 그녀는 주도적으로 재동경 여학생의 모임인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다. 전영택과 이광수가 고문이었다. 1917년 6월에는 기관지 <여자계(女子界)>를 창간하고,정월은 허영숙과 함께 편집위원이 된다. 허영숙은 나중에 이광수의 부인이 되는데 그녀 역시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에 의해 도쿄 유학을 하게 됐던 것이다. 정월은 동경 유학생 동인지인 <학지광>에 글을 쓰기도 한다.

그녀는 기독교 신자로 1917년 12월 동경 고치마치 구(麴町區) 이이다 정(飯田町) 조선연합교회 교회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이미 10월 17일에는 조선교회당 내에서 열린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임시 총회에서 총무로 선출된 바가 있다.그는 당시 도쿄에서 발행되던 <세이토(청도, 靑 )>라는 잡지에 빠져든다. 1911년 창간되어 1916년까지 간행된 여성해방 운동을 주창하던 잡지였다. 그럴 즈음 그녀는 최승구(崔承九, 1892-1917)와 사랑에 빠진다. 최승구는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1910년 일본으로 건너 가 게이오 대학 예과에 들어간다.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학지광>의 인쇄인을 맡아 했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은 신익희였다. 최승구는 나혜석의 아버지가 군수를 지낸 바 있는 시흥 출신이었다. 또한 오빠의 친구이기도 했다. 도쿄 재일본 한국 YMCA의 일을 보던 최승만(崔承萬, 1897-?)이 그 동생이다.

최승구는 이미 조혼해 부인까지 있었으나 정월과 약혼을 한다. 그녀가 동경 유학, 4년째 되는 21세 때였다. 그녀는 최승구 외에도 이광수, 염상섭 등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첫 사랑 최승구는 1917년 폐병으로 죽는다.

이광수(1892-1950)는 작은오빠 경석의 친구였는데 이광수는 경석보다는 2살 어렸고 정월보다는 4살 위였다. 이광수는 후에 부인이 되는 허영숙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는데 그중 1918년 편지에 나경석과 나혜석에 관한 글이 나온다.

미래의 남자와 만남, 교토에서

그녀는 교토(京都)로 간다. 그녀의 미래를 결정할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교토 인구 50만 시절이었다. 바로 청구(靑邱) 김우영(金雨英, 1886-?)이었다. 그는 경상남도 동래읍 복천동(福泉洞) 태생으로 우여곡절 끝에 오카야마(岡山) 6고(高)를 거쳐 교토 제국대학 정경학부 법률과 학생이 된다.

청구는 길전정(吉田町) 청년회관 기숙사로 그녀를 안내한다. 그녀는 교토의 물 맑은 풍광에 도취된다. 사랑까지 곁들여 그녀는 행복을 느낀다. 청구는 나혜석보다 10살 연상이었다. 비교적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는 고향에 처가 있고 딸을 하나 두고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처는 그가 입학하던 해인 1916년 봄에 죽었다. 청구는 교토 조선유학생친목회 간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구를 한창 만날 즈음 정월은 도쿄 히가시 오쿠보(東大久保)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경제대 청년회 웅변대회에 연사로 온 길에 그녀의 자취집을 찾는다. 그들은 오쿠보 전차 정거장에서 가까운 수풀로 가서 함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1918년 3월 그녀는 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다. 그녀의 학창시절 습작이나 그림들은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녀의 여자미술학교 후배로는 백남순(白南舜)이 있다. 1923년에 입학했으나 입학 1년 후 중퇴, 파리로 간다.

할 일 많은 귀국행

1918년 4월 그녀는 5년간의 도쿄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그녀는 오빠의 집인 익선동(益善洞) 126번지로 들어가고 정신여학교의 선생이 된다. 1919년에는 운니동(雲泥洞) 37번지 집에서 그림을 그린다.

3·l운동이 터지자 그녀는 이화학당 기숙사로 박인덕을 찾아간다. 박인덕은 당시 이 학교 선생이었다. 그 방에서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의논한다. 개성과 평양으로 다니며 지인을 만나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를 권유한다. 3월 5일 아침 이화학당 식당에서 만세운동을 한다. 이 사건으로 3월 18일 체포되어 경성지방 검사국으로 넘겨진다. 서대문 감옥에서 5개월여 옥고를 치른다. 그는 그후로도 의열단의 뒤를 봐주기도 한다.

귀국한 김우영은 1918년 8월 경성에서 변호사 등록을 한다. 사무실은 인사동 2층 양옥으로 추정된다. 결혼식은 1920년 4월 26일 정동예배당에서 하고, 신혼은 숭이동(崇二洞)에서 시작한다. 숭이동은 지금의 혜화동이다. 결혼하던 해 장녀를 얻는다. 청구는 1920년 12월, 정신여학교 3·1운동 주동자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의 재판에서 변호사를 맡는다. 이는 나혜석의 권유 때문이었다.

정신여학교 선생은 1920년 봄 그만 둔다. 그 즈음 김일엽과 만난다. 그녀가 목판화로 그린 <김일엽의 하루>는 이때 그려진 것이다.

그녀는 1921년 3월 서양화 개인전을 연다.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후원이었다. 경성일보사 내에 있는 내청각(來靑閣)이라는 음식점에서였다. 화랑이 있을 리 없을 때였다. 내청각은 모임 장소로 많이 쓰여졌다. 전시회에 무려 7천명의 관객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대중적 공간이었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여류 최초의 유화 개인전이었고 고희동 이래 두 번째였다.

개인전을 끝낸 그녀는 1921년 9월 남편을 따라 만주 안동현으로 간다. 압록강 바로 건너편이다.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어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단동(丹東)시이다. 그때 그녀는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5년을 보내며 만주 일대를 여행하기도 한다. 이 즈음 많은 그림을 그리는데 그 그림은 거의 다 건축화였다. 건물을 화면 가득히 채우는 그런 그림들이다. 만주 봉천 풍경이 그런 유였다. 그녀가 건축의 미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유럽 여행에서도 거리 풍경, 건축물들을 주로 그린다. 기하학적 건축, 고궁의 재현에서 그 특기를 보이고 있다.

1927년 6월 32세의 정월은 남편의 임기가 끝나자 벽지 근무자에게 주는 혜택으로 함께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하얼빈에서 출발 파리까지 간다. 1929년 2월까지 20개월에 걸친 여행이었다. 남편은 새로운 임지인 독일 베를린으로 가고, 그녀는 혼자 1년을 파리에서 지낸다. 파리의 솰레 부부의 집에 과객으로 머물렀다. 약 8개월의 파리 생활이었다. 그 때 그녀는 최린(崔麟, 1878-?)과 염문을 뿌린다. 턱없는 루머가 떠돌아 다녔다.

틀 밖의 여인

그리고 1930년 11월 35세의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한다. 11년간 살고 이혼한 것이다. 그녀는 1929년 3월 세계 일주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다. 풍광이 명미한 동래 자택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짐 두 짝에는 포스터와 그림엽서, 레코드와 화구(畵具)뿐이었다.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어렵게 1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되며 살 집을 직접 짓기도 한다. 1933년 2월 그녀는 서울 수송동 46번지 15호 목조 2층 건물에 여자미술학사(女子美術學舍)를 개설한다. 그녀가 졸업한 여자미술학교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934년 정초 그녀는 도쿄에를 간다. 아마 그림 재료를 사러 간 것으로 보인다. 그 때 18년 전 그를 따르던 사토우를 우연히 화구점 앞에서 만난다. 그때까지 그 화가는 미혼으로 남아 있었다. 3월에는 고향 수원으로 간다. 서호 성 밖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수원 용주사 포교당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1935년 10월에는 진고개에 있는 조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갖는다.

그녀는 1937년 수덕사를 찾는다. 일엽 스님이 있는 견성암(見性庵)에 묶는다. 일엽 스님 표현대로라면, “그렇게도 잘났다던 나혜석! 미의 화신으로 남자들의 환영에 둘러 싸였던 나혜석!, 최초의 여류화가로 여류 사회를 그렇게 빛냈던 나혜석!”이 그녀를 찾았다. 그것도 나락에 떨어지는 모습으로-. 수덕사의 주지였던 고승(高僧) 만공(滿空)은 그녀에게 고근(古根)이라는 불명을 지어 준다.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서 장기 체류한다. 수덕여관은 이응로(1904-1989) 화백이 한때를 지내던 여관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1938년 8월 <삼천리>의 ‘해인사의 풍광’을 끝으로 그녀의 화업(畵業)은 끝났다. 아마 그녀는 그의 말대로 ‘떨리는 두 손에 화필과 팔레트를 들고 암흑을 향하여 갔으리라.’1943년판 <조선인명록>을 보면 이혼한 전 남편 김우영은 충청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토제대를 나온 덕분에 그는 총독부 사무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친일파였다. 김우영은 당시 대전부 대흥정(大興町) 관사에서 살았다. 이때의 전화번호부는 723번이었다. 그들은 이혼할 때 4남매를 두고 있었는데 그들도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학교도 대전에서 다녔다.

장녀 이름은 김나열(金羅悅)로 지었는데 신혼 초 희열의 결정체였다. 남편의 성과 자신의 성을 합친 것이다. 아들 이름은 파리에서 나아 김건(金建)이라 한다. 그후 김우영은 전라남도로 옮겨 국장에 앉아 있다가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다(일본, 종성회, 최석의, ‘조선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나혜석’, 1996.4.6). 김나열은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개성의 한 여학교 선생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혜석은 1939년 수덕사를 나와 김우영을 찾아갔으나 박대당하고 내쳐졌다 한다. 이것이 가족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김우영은 1953년 회고록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후의 행적은 모른다.

1941년 시국은 나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상인도 살기 힘든 시대였다. 함묵증(緘默症)에 빠져 있던 그녀는 1944년 10월 22일 인왕산 부근 청운양로원에 최고근(崔古根)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945년 해방 무렵에는 해관(海觀) 오긍선(吳兢善, 1878-1963)이 운영하는 안양에 있는 기독보육원 농장에 있었으나 그후 행방불명되었다.

오긍선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현재의 서울시립 남부병원이다. 그리고 1949년 3월 4일자 관보에 주소불명의 행려 사망자로 실린다. 사후 그녀의 묘지마저 불분명하다. 화성군 봉담면 어디 있다고만 알려져 오고 있다.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송이 꽂아다오.”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으나 그녀의 살아온 ‘행로(幸路)’는 선각자의 행복의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재일교민 시사 정보지 [아리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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