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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 > 내용   2008년01월03일 제6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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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은 철천지 원수였나

민족 투쟁사만 부각, 교류를 통한 문화 발전은 왜 못보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족주의는 늘 고대사 속에서 ‘타 민족에 대한 우리의 영웅적 투쟁’을 부각시킨다. 그렇게 해야 오늘날에 와서 군사주의적 기운을 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지금까지 동일한 정체성을 계속 보유해온 ‘우리의 유구한 역사’까지도 ‘당연한’ 사실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고대사 속의 ‘타 민족과의 투쟁’의 상대자가 지역 강대국이었다면 “우리가 이겼다!”는 자존심이 오늘날 국가에 대한 존경과 충성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 북한 학계에선 덕흥리 벽화고분의 묘주인 진(鎭)이 중국계 귀화인이라는 사실이 철저하게 부정된다. 2005년 7월 고분 조사에 참가한 남북 학자들. (사진/ 연합뉴스)

피히테의 게르만에 대한 오해

독일 민족주의의 아버지라 할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가 그 명강연인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08)에서 기원후 1∼4세기의 로마제국에 대한 게르만 부족의 항쟁의 의미를 부각시켜 “로마를 물리친 선조 덕분에 우리가 노예적인 로마화의 길을 가지 않고 게르만의 피와 정신의 순수성을 지켜 지금까지 자랑스러운 독일인으로 살아왔다”고 주장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로마와 싸우고 무역하고 로마의 부유한 도시들의 재물을 약탈하기도 한 게르만계 부족이 자신을 ‘독일 민족’으로 인식하지도 않았으며 게르만 지역의 밀림 속에서 로마 군인들을 몰살해 그 값진 무기와 갑옷을 빼앗는 일을 ‘민족 항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만, “민족만이 세계사의 진정한 주인공이며, 민족에 대한 사랑만이 진정한 영적 삶이다”라고 생각했던 피히테의 입장에서는 게르만 추장들은 이미 로마제국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을 가진 ‘민족의 선각’들이었다. 자신도 17세기 중반에 독일에 정주한 스웨덴 군인의 후손이었던 피히테가 로마제국의 다양한 주민 집단들이 기원후 1세기 이후로 게르만 부족들과 상당히 섞였다는 사실, 즉 ‘순수한 독일 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작센주의 라메나우시 근방에는, 10세기경 게르만계 영주들이 이 지역을 장악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슬라브계 선주민의 후손이 꽤나 많이 살지 않았던가? 그러나 ‘피의 순수성’을 믿고 싶은 민족주의자에게 ‘순수한 피’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는 건 우이독경보다 더 보람 없는 일이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 일본 문부성에 의해 ‘시국 교육 자료’로 분류돼 일역된 것은 1917년이기에, 유럽 언어의 구사 능력이 약했던 신채호가 이를 1900년대에 봤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피히테와 신채호라는 두 명의 거물 민족주의자가 이심전심으로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피히테가 좋아했던 ‘민족적 자아와 민족적 타자의 사생 대결’의 논리를 신채호도 특히 중국인과 고구려의 관계에 잘 적용시켰다. 신채호에 의하면 “지나족(중국인)이 우리의 신성한 부여족(즉, 한민족)의 영원한 교전 상대였으며, 그 아(我)와 피(彼) 투쟁사의 꽃은 바로 고구려와 지나족 사이의 전쟁들이었다”(<독사신론>·1908). 그 당시 국수주의자를 자칭한 신채호야 고구려와 지나인들의 ‘사투의 역사’에 주목하고 을지문덕을 한국사상 최고 영웅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기독교적인 온건 민족주의자 함석헌도 고구려가 만주를 장악해 한민족을 ‘대민족’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하고 중국인에게 패망했다는 것을 한국사의 일대 비극으로 보지 않았던가?(<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1934) 그만큼 ‘고구려사는 중국인과의 항쟁의 역사’라는 등식이 이미 확고해진 것이었다.

중국 포로들, 끊임없이 유입

남한 최초의 수준급 고대사 개설서인 <한국사 고대편>(이병도·김재원 지음, 1959)도 “고구려의 발전이야말로 주로 한나라 군현과의 투쟁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못박고 있지만, 원래부터 ‘반침략 민족 투쟁사’ 위주로 과거를 정리해온 북한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고구려의 투쟁을 대하는 태도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종교에 가깝다. 1960년대 초 같으면 북한 사학에서 아직까지 계급의 논리가 민족의 논리에 완전히 압도당하기 이전이지만, 이미 그때도 “당나라 침략자와의 투쟁의 영웅 연개소문”이 “자주적 노선을 견지한 인물”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됐다.(<조선통사>·1962) 연개소문이 지배계급의 대표자였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로 이해됐다.

고구려를 우선적으로 ‘중국인들과 교전한 나라’로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나중에 고구려의 근거지가 된 예맥의 거주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을 기원전 107년부터 통제하려 했던 것은 한나라 사군 중 하나인 현토군이었으며,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을 요동으로 쫓아낸 것은 나중에 고구려의 건국을 가능케 한 예맥 부족들의 중요한 승리였다. 그 뒤 부여(오늘날 길림 지역)에서 비교적 늦게 이주한 계루(桂婁) 집단이 예맥 계통의 다른 집단들을 누르고 고구려를 건국해 인접 소국들을 부속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것은 역시 중원의 국가들과 요동에 있는 그들의 군현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 역사가 한인(漢人)들과의 전쟁 기록으로 가득찬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전쟁이란 죽임과 약탈만을 의미했던가? 전쟁의 와중에서 특히 솜씨 좋은 수공업자, 기술자들이 언제나 가장 값비싼 전리품이었으며, 그들을 노획하는 것은 전쟁의 주된 목적 중 하나였다. 이러한 ‘강제 이주’는 본인들에게야 비극이겠지만 결국 이들의 2세나 3세는 승전국의 주민들과 섞이면서 그 문화를 더 빛나게 만들곤 했다. 로마제국과 게르만 부족들 사이의 상쟁이 그 접경 지역에서의 ‘인구 교류’를 의미했듯이, 고구려와 중국 국가들 사이의 전쟁들도 한인(漢人)계 ‘생구’(生口·포로)의 대대적인 노획과 고구려에서의 정주를 의미했다.


△ <연개소문>과 같은 최근의 고구려 사극들은 고구려와 중국 왕조의 대립을 조명한다. 고구려의 중국 귀화인들도 조명해볼 만한 역사의 일부분이 아닐까.

예컨대 121∼122년에 고구려의 태조대왕(재위 53∼146)은 한나라의 요동 지방 군현들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요동의 한인 2천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고구려로 데려가고, 그 유명한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재위 384∼391)은 연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요동에서 1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중국 자료에 의하면 산상왕(재위 197∼227) 시대에 선비(鮮卑) 등 요동의 비중국계 인구도 고구려가 노획하는 등 고구려 인민 속으로 수많은 타자들이 늘 유입됐다. 4세기 후반 고구려에 노획된 중국인의 후손은, 7세기 초반 수나라와의 항쟁에서 고구려 편에 서서 참전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과연 고정된 국경이 없는데다 인구 유입과 유출이 비교적으로 자유로워 인구 구성이 늘 새로워지는 고대 국가 사이의 전투들을 오늘날의 ‘민족 투쟁’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과학적인 사학일 수 있는가? 그 당시 항쟁의 주체들은 민족이 아닌 국가였으며, 고구려 국가의 다양한 종족적 구성에 다수의 중국인들도 자연스럽게 포함돼 있었다.

동수 고분의 주인은 중국 귀화 관료

고구려에 본의 아니게 끌려간 중국인도 있었지만 중원의 전란 속에서 고구려를 ‘새로운 조국’으로 선택한 중국인도 꽤 많았다. 낙랑 한인들의 귀화는 국초부터 시작됐지만, 특히 한나라가 위기에 빠진 2세기 말엽에 많은 중국인이 고구려를 피난처로 생각해 찾게 됐다. 197년에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져 한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해 고구려에 와서 의탁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고 하고, 또 217년에 한나라의 한 지방 관료가 “백성 1천여 호를 이끌고 와서 의지했으므로” 산상왕에 의해 거주처를 배정받았다.(<삼국사기>) 고구려로 귀화하려는 이들의 행렬이 그 뒤로도 끊어지지 않았기에 인구의 지속적 감소를 우려한 인접 중국 국가들이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552년에 북제(北齊)라는 중국 북쪽의 왕조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해 중국 유민의 송환을 요구했을 때 그 사신이 고구려 쪽의 반발에 부딪치자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고구려 왕에게 주먹질까지 했다는 것은 중국 쪽 자료(<북사>)의 이야기다. 결국 그 사신이 중국인 귀화인 5천여 호를 다시 데려갈 수 있게 됐는데, 이러한 ‘귀화인 송환’을 허락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백제와 신라, 그리고 신흥 돌궐(터키 계통의 유목민) 제국의 공격에 시달려 사면초가에 빠진데다 내부적으로 귀족 간의 대립이 심화된 고구려의 좋지 않은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에서 살았던 중국계 수는 이 5천여 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중국 자료(<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인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고, <사기> <후한서> <삼국지> <옥편> <문선>(양나라 때 만든 시문집) 등을 읽는다”고 돼 있는데, 이와 같은 한자 보급이나 서적 교류는 중국인의 귀화, 그리고 중국과의 무역 없이 가능했겠는가?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위치한 화려한 벽화고분 덕분에 자못 유명해진 동수(冬壽) 등으로 대표되는 고급 망명객들도 고구려에 투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336년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는 그 뒤로는 고구려와 전연 사이에서 외교 관계를 조절하는 역할을 맡았으리라 추측되는데, 그 묘지명에서 확인되는 ‘낙랑상’(樂浪相)이라는 벼슬이 전연에서 획득한 것인지 고구려의 고국원왕(재위 331∼371)에게 받은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만약 고국원왕에게 받았다면 그가 과거 낙랑 지역(평양 일대) 중국 유민의 통할을 맡았으리라고 추측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 정권의 중국 귀화 관료에 대한 신뢰가 상당했다고 봐야 한다.

피히테가 “로마제국에 대한 독일 민족의 결사적 저항”을 극구 찬미했지만, 실제로는 발틱해 해안에서 생산되는 호박(琥珀)과 가죽 등을 고가로 사들이고 대신에 무기류와 유리, 도자기 등을 팔았던 로마인과의 무역은 게르만 부족의 물질 문화의 향상을 도우면서 그 사회의 계급 분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중국 여러 나라들 사이의 전쟁이 치열한 만큼 인구의 상호 교환도, 문화 교류나 무역도 매우 활발했던 것이다. 낙랑의 남은 인구와 중국계 전쟁 포로, 귀화인, 망명객 등은 고구려 문화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동수의 고분이 한나라 벽화고분의 전통을 이어 고구려에 최초로 이식한 것처럼, 중국 귀화인은 특히 고급 문화의 전수에 공을 많이 세웠다.

고구려-중국, 어느 길을 택할까

벽화고분의 전파도 그들의 공로였지만 이와 함께 그들에 의해 수많은 기술이 수용됐다. 예컨대 동수의 고분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 공간을 두 번 좁혀 그 위에 뚜껑 돌을 얹는 ‘모줄임천장’(抹角藻井)이라는 독특한 기법인데, 중동 지방에서 발명된 이 기법이 중국 북부 지방을 거쳐 중국 유망민에 의해 고구려 등 한반도 지역에 전해진 것이다. 또 오늘날 북경 일대인 유주(幽州)에서 지방관(자사·刺史)을 지냈다가 고구려에 망명해 408년에 죽은 중국인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 벽화고분의 묵서에서 아마도 한반도 내의 금석문으로서 최초로 공자(孔子)가 언급되는데, 유교 사상의 전파에서 중국 망명객의 역할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역사쓰기란 현재적 선택의 문제다. 타자에 대한 적대성을 부각해 국가주의적 내부 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속의 전란들을 민족적으로 해석해 ‘타 민족과의 영웅적 항쟁’의 역사를 쓸 수 있는가 하면 타자들과의 섞임, 어울림, 교류를 중심에 놓는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국경을 넘는 지역 공동체 만들기를 지향할 수도 있다. 과연 고구려-중국 관계를 정리할 때 우리가 어느 길을 택해 동북아시아 지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참고 문헌

1. <한국고고학 개설> 김원룡, 일지사, 1992, 152∼175쪽
2. <요동사> 김한규, 문학과지성사, 2004, 270∼329쪽
3. ‘고구려 집권체제 성립 과정의 연구’ 임기환, 경희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5, 203∼240쪽
4.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395∼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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