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칼럼 > 시 읽어주는 남자 목록 > 내용   2008년05월15일 제710호
통합검색  검색
이 엄살, 아프다

속물의 시대에 쓰는 자학과 투덜거림,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신형철 문학평론가

반성하는 시인보다는 엄살떠는 시인이 더 애틋하다. 간만에 제대로 된 엄살의 기록을 읽었다. 시인 심보선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등단했지만 오랫동안 휴업 상태로 있다가 몇 년 전 시인으로 돌아왔다. 고대했던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펴냄)가 나왔다. 표제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런 문장도 있다.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슬픔의 진화’) 치욕을 잊어버린 시대에 영혼이 뚱뚱해진 시인이 슬픔에 익숙해진 채로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속물의 시대에 차마 주먹질은 못하고 멱살만 잡고 떤다. 이 슬픈 신경질이 감미로울 정도로 생생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은 여기서 끝이 난다”(‘식후에 이별하다’)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도 끝이 난다. 그 끝의 순간을 노래한 시다. 아마도 남녀는 죽을 먹고 있었을 것이다. 숟가락으로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죽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이제 이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한 생을 ‘휘젓지’ 못하는 이 “고요한 풍경” 같은 연애가 피로했을 것이다. 이 식사가 끝나면 사내는 이별을 고하리라. 이 “이상한 기근”이 초래한 이별을 연애의 그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이 환멸과 허기는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이제 멸망한 지 오래다”라는 저 깨달음의 산물일 것이다. 시인은 ‘지금 여기’와 이별하고 있는 것이다. “뒤돌아보면/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꿈과 현실/ 둘 다.”(‘미망 Bus’) 이 이별 뒤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소설 이론 쪽에는 ‘문제적 개인’(루카치)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제 시 쪽에서는 ‘문제적 자아’라는 개념을 발명해보자. 반성하고 감동하고 배려하는 자아 말고, 시비 걸고 자학하고 투덜대는 자아 말이다. 우리는 시의 ‘나’가 반드시 ‘자아’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 이런 문제적 자아의 시는 인텔리겐치아와 프티부르주아의 틈새에서 고해성사처럼 쓰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물컹물컹 배어나와 아프다. 요즘 시에서 이런 ‘자아’가 드물고, 이런 자아의 ‘육성’이 듣기 쉽지 않고, 육성으로 울려오는 ‘엄살’을 만나기도 어렵다. 이 모든 것이 이 시집을 “빛나는 폐허”(‘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로 만든다.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펴냄·1998)가, 최근에는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펴냄·2005)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聖者)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나, 형의 기분 알 거 같아요, 저도 이 시대가 지긋지긋해요, 그 ‘빛나는 폐허’에 나도 끼워줘요. 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