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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안인용의 개그쟁이 칼럼 목록 > 내용   2006년08월17일 제6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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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네, 강유미의 디테일

코너 전체를 촘촘한 대사로 이끌어나가는 연기력과 내공…

준비된 말투와 시선, 소품 활용으로 무릎 치게 만들어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영화나 TV 드라마에 관한 평을 읽다 보면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문구를 만난다.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말은 디테일의 우리말인 세밀함이나 상세함이 잘 표현돼 있다는 뜻이다. 세밀함이 잘 표현된 작품에서는 리얼리티, 즉 가상 세계와 현실의 거리가 좁고 그만큼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체온인 36.5도로 다가갈 수 있다. 영화와 드라마, 문학에서는 디테일의 대가들이 있다.


△ 디테일에서 강한 개그우먼 강유미의 히트 코너 ‘고고 예술 속으로’(위). 이 코너에서 강유미는 안영미와 손을 잡고 사소한 점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디테일 개그를 선보였다.

박찬욱이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한구석 그림자까지 꼼꼼하게 신경쓴 장면이나 실감나는 대사로 웃음과 눈물의 38선을 넘나드는 장면에서 디테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김수현의 드라마에서는 대사만 들어도 공간과 연기, 감정까지 공감하게 하는 꼼꼼한 단어 선택에서 디테일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작가 박민규도 사소한 기억까지 모조리 종이에 털어놓는 디테일을 소설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삼는다.

늘 과도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개그에도 디테일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대 위에 기껏 서너 명 올라와 대단치 않은 소품들로 연기를 하는 개그에 디테일이 어딨느냐고? 개그에는 강테일, 강유미가 있다. 강유미 개그가 ‘되는’ 이유는 첫째 그의 연기력이다. 그 다음 둘째와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아홉째, 열째 이유는 모두 ‘디테일X9’다. 강유미의 디테일은 우선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강유미는 다른 개그맨들에 비해 대사량이 많은 편이다. 드라마에서 대사 분량이 많다는 말은 ‘글빨’이 좋다는 말이란다(<드라마티크> 2호, 윤여정 인터뷰>). 개그에서도 마찬가지다. 짧게 치고 들어가는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코너 전체를 촘촘한 대사로 이끌어가는 내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손동작, 시선 하나도 허술하게 처리하지 않는 연기도 디테일 그 자체다. 그래서 강유미의 디테일 개그는 ‘맞아, 맞아!’ 하며 무릎을 치게 만든다.

강유미의 디테일 개그 1번지는 ‘고고(GoGo) 예술 속으로’다. 디테일에서 절대 뒤지지 않는 안영미와 짝을 이뤘던 이 코너는 디테일의 향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번 같은 장면을 다른 장르로 바꾸면서 디테일을 모조리 개그로 승화시킨 강유미의 개그를 거들떠보자. 크리스마스날 여자친구와 남자친구의 만남을 여성 전용 순정만화로 만든 편을 보면, 잘나가는 ‘푸르메’ 강유미가 모범생 ‘이슬비’ 안영미를 떠올리며 자기 주변에 찝쩍대는 금발 미녀를 물리친다. 이때 ‘푸르메’는 금발의 미녀에게 이런 대사를 날린다. “꺼져, 패리스 힐튼! 저기 올슨 자매랑 놀아!” 그 어떤 개그에서 ‘패리스 힐튼’에 ‘올슨 자매’가 등장하는가. 캐머런 디아즈도,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아닌 ‘올슨 자매’. 디테일이 여성전용 순정만화의 리얼리티로 환생하는 순간이다.

이어지는 남성 전용 학원만화에서는 과도한 글래머인 ‘채소연’ 안영미가 남자 주인공 ‘마태풍’ 강유미를 잡으려는 불개미단에게 붙잡혔다. 무릎을 꿇고 있는 ‘채소연’의 다리모양은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A자, 수영으로 치면 평형 자세다. 그러고 보니 만화 속 글래머 여주인공은 항상 A자로 앉아 있다. 강유미는 ‘봉숭아학당’에서 강유미 기자로 등장했다. ‘봉숭아학당’의 강유미 기자는 ‘고고 예술 속으로’에서 안영미와 함께 보여준 적 있었던 뉴스데스크 버전 속 강유미 기자를 발전시킨 캐릭터다. 강유미 기자는 늘 과도하게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유난히 입모양으로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하며 새롭지도 않은 소식을 늘 뻔한 멘트로 전해준다. 매번 엇비슷한 뉴스 멘트인 것 같지만 잘 들어보면 미담, 재난, 스트레이트 등 다양한 뉴스 포맷의 멘트를 활용하고 있다.


△ ‘봉숭아학당’(아래)에서는 방송기자의 모습을 대사 하나 놓치지 않고 실감나게 따온 ‘강유미 기자’로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고고 예술 속으로’의 디테일을 다시 재현한 코너는 역시 디테일 연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세윤과 손을 잡은 ‘사랑의 카운슬러’다. 스타와 결혼한 팬 편을 거들떠보자. ’엘오엘오엘오브이’ 노래가 나오면 강유미는 마스크를 벗으면서 시작한다. 팬클럽의 상징인 마스크를 벗으며 강유미는 이렇게 얘기한다. “오빠 피곤하시거든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요’다. 지그시 눌러주는 듯한 ‘요’와 10도 각도로 내린 얼굴, 15도 각도로 치켜뜬 눈은 누가 뭐래도 여느 아이돌 팬클럽 임원의 모습이다. 옷가게 주인과 결혼한 남자 편에서 옷가게 주인 강유미가 다리 한쪽을 90도로 세우고 앉아 밥을 먹는 은쟁반 위에는 둔탁한 갈색 그릇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분명 인근 분식집에서 3500원 하는 육계장이나 설렁탕, 김치찌개를 시켜서 먹고 있었을 것이다. 디테일은 이렇게 사연을 만들기도 한다.

허술한 진행 가운데 허를 찌른다

세트에서 진행하던 콩트식 개그가 지금처럼 무대에서 보여주는 공개 개그로 바뀌면서 웃음의 코드는 점점 허술한 진행 가운데 허를 찌르거나 반전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개그맨들의 연기는 단순명료해지고 대사는 유행어 위주로 점점 짧아진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세밀한 연기보다는 들이대는 식의 연기가 늘어나고 있다. 개그맨은 작가이자 연출자, 연기자다. 디테일에 더 신경을 쓸수록 텅 빈 무대는 작은 연기와 소품, 대사만으로 꽉 차고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집중력도 같이 높아진다. ‘단순함’으로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웃음의 코드에 ‘문화적 다양성’을 찾아주고 개그맨들의 웃음신공도 한층 높여줄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바로 디테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