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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 ] 2003년12월04일 제487호 

[류승범] 올드보이를 탐내는 청년

영화배우 류승범, 그가 ‘은행을 털어서라도’ 지키고 싶어하던 젊음에 집착을 버린 이유는…

4년 전 서울 명륜동에 있는 영화사 ‘명필름’ 사무실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배우들과 감독이 둘러앉아 대본 읽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뒤, 조명감독이 오자 임순례 감독이 배우들을 소개하는데 류승범을 ‘이번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스타급인 배우’라고 소개했다. 그랬다. 그는 이미 그때 연기를 십수년 한 우리들보다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나로 영화계를 ‘평정’한 무서운 신인이었던 거다. 감독의 그 말을 듣고 우리 선배들은 키득키득 웃었고 갓 스무살이었던 그 ‘아이’ 얼굴은 스크린 안에서의 뻔뻔스러움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귀밑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드랬다.



스무살과 불로초

사람들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보여준 그의 양아치 연기가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역할을 동일시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사석에서 만나면 잘생긴 얼굴은 아니어도 귀티가 가득한 용모와 전혀 흐트러짐 없이 예의 바른 행동거지를 보고 당황해하기 일쑤다. 같이 작업을 한 나조차도 그가 선배들에게 깍듯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을 보고 신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자연인 류승범은 음악에 미쳐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음악DJ를 했던 그 시절에도 여전히 수줍음 많고 품성이 착한 그런 아이였다. 수줍음 많고 품성이 고운 아이는 음악에 미쳐 학교에 안 나올 리 없고 학생 신분에 음악다방 DJ를 할 리는 더더욱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편견이요 선입견일 뿐이다.

김지운 감독이 연기천재라고 부른 그는 4년 전 함께 작업하면서 나로 하여금 깎지 않은 원석을 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줬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 4년 동안 수많은 도정의 과정을 거쳐 이제 연극무대에까지 서고 있다. (원래 천재들의 특징이 ‘월반’이라더니 정말 그도 그랬다.) 그가 출연하는 연극은 내가 8년 전에 출연했던 ‘차이무’의 <비언소>여서 그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대학로에서 그를 만났다.

<와이키키…> 촬영현장에서의 그를 떠올릴 때마다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분장을 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막내인 그가 끼어들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자신은 지금이 너무 행복하고 젊다는 게 너무 좋다. 그래서 죽는다는 건 고사하고 늙는 것도 너무나 두렵다. 그래서 이 세상 어딘가에 불로초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은행을 털어서라도 꼭 사다 먹고 싶다는 거다. 스무살이 얼마나 좋으면 저런 얘길 할까 싶어 우린 다 깔깔 웃었고 누구는 나중에 자신이 불로초를 발견하게 되면 자기가 안 먹고 갖다주겠다고 농을 했다.



한데 한참 웃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본 우린 모두 머쓱해지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었던 거다. 난 그때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일었드랬다. 그의 눈부신 스무살을 내가 지켜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지했던 그때 그 아이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월 앞엔 장사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어느덧 문득 깨달을 그의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니 맘이 짠해졌드랬다.

<비언소>에서 세상 공부를 하는 중

4년 동안 안으로나 밖으로나 많은 성장을 한 그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도 불로초가 먹고 싶냐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스무살이 쑥스러운지 또다시 얼굴이 발개지다가 금세 진지해져서 얘기한다. 여전히 죽는 건 두렵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찾고 싶지만 요새 와서의 생각은 스물넷이라는 나이가 멋진 배우가 되기엔 턱없이 어린 나이라는 걸 느낀다면서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면 빨리 나이를 먹는 것도 나쁠 거 없겠다는 생각을 한단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영화 <올드보이>를 봤는데요, 유지태 선배님의 연기가 최민식 선배님의 연기보다 못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하시긴 했지만 나이를 먹은 배우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따라잡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이더라고요.”


사진/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젊음을 부담스럽게 느낀다는건 그가 4년 동안 안으로나 밖으로나 성장을 했다는 증거일 거다.


‘은행을 털어서라도’ 지키고 싶어하던 젊음을 부담스럽게 느낀 동기는 오로지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던 거다. 이 연기에 대한 욕심이 생긴 원년은 <와이키키…>였단다. 그 전엔 그저 음악을 하고자 하던 꿈을 재능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포기한 직후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심심해서’ 한 거였다면 <와이키키…> 현장과 무대에서 십수년 내공을 쌓은 사람 좋은 형님들과 어울리면서 그는 비로소 배우가 되기를 꿈꿨던 거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그때 배우가 되기를 ‘결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배우였던 자신을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다가 그때 ‘발견’한 것일 뿐이다. 예수가 열심히 노력해서 구세주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세주의 운명을 갖고 태어났는데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살아오다가 어느 날 그 사실을 스스로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풍자극인 <비언소>를 공연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하나 공부를 많이 했을 뿐 선배들이 해주는 세상 얘기가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비언소>의 기본 뼈대는 통일이다. 하지만 류승범은 “이산가족들이 정말 가엾긴 하지만 통일이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통일이 곧 평화라는 보장이 어딨어요. 통일돼도 여전히 사람들은 싸울걸요. 전 오히려 통일이 더 혼란을 가져올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이 어찌됐건 간에 연극작업이 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가 되어주는 건 고무적인 일이라 믿는다. 지금은 조금 불안하지만 젊을 때의 생각은 계속 바뀌게 마련이며,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선배들은 모두 똑똑하고 건강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으악, 원형탈모증!

요새 계속 폭탄 맞은 듯한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세상에… 원형탈모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거다. 스트레스가 백퍼센트 이유인 원형탈모가 왜 지금의 그에게 생긴 걸까. 연기가 너무 좋아서 미친 듯이 연기만 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스타가 되어 있더란다. 한데 자신의 ‘속’은 전혀 변한 것이 없거늘, 사람들이 자신을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 안에서만 보려고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특히 가까운 지인들조차도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일찍이 부와 명예를 얻은 대신 또 다른 홍역을 앓고 있는 중인 거다. 그것도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말을 해주려다 말았다.

그가 지금 앓고 있는 홍역은 불로초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를 아끼는 선배이자 그의 진정한 팬인 나는 통과의례를 앓고 있는 그가 그저 하루빨리 자아의 실체와 만들어진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현명하게 대처해나가는 ‘어른 배우’로 거듭나길 기다릴 뿐이다.

글 오지혜(영화배우)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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