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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칼럼 > 한홍구 칼럼 목록 > 칼럼내용   2005년07월26일 제5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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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론이 탐나서 몸부림쳤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박정희의 직접 지시로 이뤄진 부일장학회와 경향신문사 강탈
이런 ‘노후대책’ 마련해 놓고도 왜 그리 권력에 연연했을까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원회)는 7월22일 5·16 군사반란 직후 부일장학회 등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에 따른 의혹 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원회로서는 7개 우선조사 사건에서 처음으로 하나를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사건 조사에 깊이 간여한 민간위원으로서 시원함과 두려움, 그리고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 시원하다 한 것은 조사 중인 사건인데다 뒷산에 대밭조차 남아 있지 않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외치지 못하던 처지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일도 많은데다 매일 보는 자료는 진실위원회 조사 사건 관련 자료인데, ‘역사이야기’에는 다른 이야기를 써야 하니 준비 부족으로 힘들 때가 많았으나, 적어도 한두번은 그런 걱정은 덜게 되었다. 두려움은 당연히 우리가 조사한 결과가 혹시 잘못되거나 부족한 것은 없는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착잡함은 깡패들이 국가를 장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2차 자료로만 보아 오다가 피해자와 가해자를 직접 만나보고 1차 자료로 확인하면서 들게 되는 심정이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칼만 안 들었지”란 말을 많이 쓴다. 저들은 분명 칼은 안 들었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워 나라를 빼앗은 자들이 아닌가? 칼 든 조무래기 깡패들 잡아넣고.

설립도 안된 5·16장학회에 헌납?

부일장학회 등 사건은 1962년 당시 첫손에 꼽히던 재력가인 김지태를 사소한 혐의로 구속시켜놓고 부일장학회 명목의 개인 소유 토지 10만평과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 100%를 ‘헌납’받고 풀어준 사건이다. 김지태에게 부정 축재 혐의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 혐의는 이미 1961년 말에 일단락됐고, 김지태와 함께 부정 축재 처리대상이 되었던 기업인 중 다시 구속됐다가 재산을 헌납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사람은 없다. 사실 박정희는 5·16 군사반란 이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지냈으며,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황용주가 <부산일보> 주필로 있었기 때문에 김지태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황용주를 통해 쿠데타 자금을 요청했는데 김지태가 이를 거절하여 미운털이 박혔다고 주장하지만, 황용주는 박정희의 부탁을 김지태에게 전하지 않았고 뒤에 그 사실을 박정희에게 해명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박정희의 김지태에 대한 앙심 때문에 벌어졌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또 일부에서는 김지태가 친일파이니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하지만, 김지태가 친일파인지 여부는 사건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만에 하나 김지태가 친일파였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박정희 같은 경력의 소유자가 친일을 이유로 남의 재산을 빼앗는단 말인가?


△ 깡패’들이 국가를 장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부일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 의혹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진실위원회.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이 사건의 본질은 박정희가 김지태에게서 빼앗아 5·16 장학회로 넘긴 재산의 성격을 보면 잘 나타난다. 김지태는 그 당시에 수십억대의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지태는 구속됐다가 풀려나는 과정에서 왜 하필이면 언론 3사의 주식을 ‘헌납’하게 되었는가? 바로 박정희가 언론사를 원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재산이 탐나서 김지태를 잡아넣고 재산을 내놓으라 했다면, 김지태가 ‘헌납’한 부산 시내의 토지 10만여평도 5·16 장학회로 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6 장학회를 만들어 장학사업을 하겠다고 표방하면서도 부일장학회의 기본 재산이던 이 땅은 국방부로 소유권을 옮기고, 언론 3사의 주식만으로 5·16 장학회를 만들었다.

박정희에게 언론의 중요성을 일깨원주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론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황용주였다. <부산일보> 주필이던 황용주는 김지태가 <부산일보>를 내놓자 <부산일보> 사장이 되었고 이어 한국문화방송 사장이 되었으니, 황용주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박정희 다음가는 이익을 본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용주의 영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박정희와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황용주는 5·16 군사반란 직후 용공분자로 입건 구속됐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됐는데, 황용주가 <부산일보> 사장이 되었을 때 권력 핵심 내에서 상당한 견제가 있었다. 황용주는 결국 <문화방송> 사장으로 있던 1964년 가을, 통일 문제에 대해 잡지 <세대>에 발표한 논문이 문제가 되어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김지태는 구속된 상태에서 5월25일 포기각서를 쓸 때는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했지만, 6월20일 작성된 기부승낙서에는 헌납받을 곳이 아직 설립되지도 않은 5·16 장학회로 되어 있다. 5·16 장학회와 그 소유로 편입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임원을 보면 박정희, 황용주와 대구사범 동창이나 대구 출신 인사들이 유달리 눈에 많이 띈다. 5·16 장학회는 박정희의 측근들이나 친인척들로 이사진이 구성됐고, 박정희 사후에는 이름마저 박정희와 육영수에서 한 글자씩 따서 ‘정수장학회’로 바꾼 채 박정희 유족들에 의해 운영됐다. 국가에 바친 재산이 이렇게 사유화됐으니, “짐은 곧 국가”라고 할밖에….

강제성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김지태가 자기 의사에 반해 기부승낙서에 도장을 찍은 이유는 생사 등 자신의 다른 재산을 지켜야 했고, 또 자신이 계속 버틸 경우 다른 기업의 경영이 어려워져 수천명의 종업원이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는 심경에서 형을 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2년 당시 박정희가 1979년까지 20년 가까이 집권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지태로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가 권력을 놓으면 빼앗긴 재산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과 관련해 언론에서 가장 관심이 쏠렸던 부분은, 첫째 박정희의 지시 여부고, 둘째 재산 헌납의 강제성 여부다. 먼저 박정희의 지시를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모씨는 자신의 명의로 2000년 <진주지>에 기고한 글에서 박정희의 직접 지시로 김지태를 구속하게 되었다고 회고했으나, 뒤에 정수장학회 문제가 부각되면서 그의 글이 주목을 끌게 되자, 박정희의 지시란 ‘알아보라’는 정도였다고 한발 물러났다. 진실위원회는 당사자의 조금 다른 주장 중에서 별다른 외부 압력이 없는 상태에서 먼저 나온 주장에 더 무게를 실어주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관계자들은 김지태의 비리에 관한 첩보를 부산지부가 입수해 독자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고 주장했으나, 그같은 주장을 입증할 만한 수사계획서 같은 문건은 남아 있지 않은 반면, 박정희가 부산을 다녀가기 직전 부산지부가 작성한 ‘정치인 실태 내사서’에 김지태에 대해 부일장학금 지급으로 국가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부정불신 사실 항목에는 “없음”이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던 김지태가 표적 수사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탐낸 진짜 이유는 언론 장악에 있다. 박정희의 지시로 개인 소유의 토지와 부일장학회를 빼앗긴 김지태씨(왼쪽). 지난해 8월 김씨의 두 아들이 열린우리당 진상조사단과의 간담회 도중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정수장학회쪽은 김지태가 재산을 자진 헌납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김지태는 이미 석방된 직후부터 기획원장 김유택을 찾아가 “선의의 기증 행위가 아니라 강제로 약탈당한 것이니 반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전제왕국 이조시대에도 이러한 행위는 없었다고 분개한 것이 1962년 7월31일치 경찰 정보보고에 나와 있다. 이 밖에도 김지태는 1962년 9월, 1963년 12월, 1971년 7월, 1980년 4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재산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한 증거가 뚜렷이 남아 있다. 사실 김지태의 경우 재산 헌납의 강제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강도에게 지갑을 빼앗길 때 강도가 내 주머니를 직접 뒤져 지갑을 빼앗아가면 강탈이고, 내가 내 손으로 꺼내주면 ‘헌납’이나 ‘희사’일까?

부일장학회 등 사건은 2004년 정수장학회 문제가 불거지면서 비교적 일반에게 알려졌지만, <경향신문> 매각은 당시에도 그렇고 그 뒤에도 그렇고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너무나 조용히 묻혀버린 사건이다. 오죽하면 진실위원회가 2005년 2월에 7대 우선조사 사건을 선정, 발표하는 자리에서 <경향신문> 사건을 선정했다는데도 기자 중에 왜 언론 사건은 선정하지 않느냐는 질문까지 나왔을까? 1974년 말에서 1975년 초의 3개월가량 진행된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 같은 것이 박정희 정권 때의 대표적인 언론 탄압으로 알려졌지만, <경향신문> 사건은 그보다 훨씬 더 악랄하고 지독했다. <동아일보> 때야 그래도 민주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대대적인 지원을 했고, 사주가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가지도 않았으며, 신문사 소유권이 바뀌지도 않았다. <동아일보> 사주가 정권의 압력에 굴복한 것도 어쩌면 <경향신문> 사건의 학습효과가 아니었을까? <경향신문> 사건은 사장이 간첩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상황에서도 1년 가까이 버티다 보니, 정권과 중앙정보부의 탄압이 더 드러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향신문> 한놈만 패기 작전

당시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은 원래 언론인 출신이 아니었고, 신문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비상한 수완이 있는 사업가였으며, 어떻게 해야 신문이 잘 팔리는지에 대해서는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먼저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했고, 젊은 기자들의 비판적인 기사를 적극 후원했다. 이런 적극적인 비판 논조는 정론지로서 <경향신문>의 존재를 부각시켰고, 박정희는 <경향신문>을 점점 더 부담스러워하게 되었다. 사실 박정희는 김지태의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빼앗을 무렵, <경향신문>을 인수하려 한 적이 있었다. <부산일보>나 문화방송과는 달리, 박정희는 <경향신문>은 그냥 빼앗는 게 아니라 돈을 주고 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마도 <경향신문>이 김지태와 같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천주교라는 거대한 종교의 소유였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친구이자 천주교쪽에도 신망이 높았던 시인 구상을 내세웠는데, 천주교쪽에서는 구상과 계약까지 체결했다가 자금이 박정희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는 계약을 파기했다고 한다. 이때는 삼성의 이병철도 <경향신문> 인수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경향신문>에 많은 돈을 빌려준 대가로 사장직에 오른 이준구가 천주교 유지재단 이사장 노기남 주교의 백지위임장을 편법으로 사용해 자신이 인수해버렸다. <경향신문>의 인수에 실패한 뒤 이병철은 <중앙일보>를 창간했지만,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경향신문>을 빼앗아버렸다.

김형욱은 박정희가 젊은 기자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못 견뎌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한-일 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때문이라면서 언론을 규제할 목적으로 1964년 8월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강행하려 했다. 이 법안에 대해 <경향신문> 등 4개 신문사가 끝까지 저항하자 정부 광고 중단, 신문용지 배급과 은행 융자 제한, 신문 수송 기피, 신문인들의 사생활 정보 수집, 나아가 정간 또는 폐간 등의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을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하기까지 했다. 당시 해당 신문사 편집국장들의 공동성명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 악랄한 수법은 일찍이 일제 때에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은 박정희가 법안의 시행을 보류한다고 발표해 외형상 언론계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는 이 과정에서 언론계의 속성과 대응 양식, 그리고 약점을 파악해 더 효과적인 언론대책을 준비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경향신문> 사건이었다. 박정희는 언론계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벌였던 1964년과는 달리 1965년에 접어들자 <경향신문> 하나만을 표적으로 삼았다.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무대포 정신이 발현된 것이다. “난 한놈만 패!” <경향신문> 사장 이준구는 1965년 5월8일 간첩방조·불고지 등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구속됐다. 그 전년 가을에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바 있어 길을 닦아놓은 셈인데, 이준구는 단순한 반공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그 당시에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분리돼 있었는데, 고무찬양 등 비교적 가벼운 죄는 반공법에 해당했고, 국가보안법은 진짜 살벌한 사건에 적용됐다)으로 그 길을 포장한 셈이다. 신문사나 방송사 사장이 어디 보통 자리인가? 전에 ‘간첩의 추억’(<한겨레21> 521, 523, 525호)에서 얘기한 1970∼80년대의 조작간첩 사건이란 것이 대개 힘없고 ‘빽’ 없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조차 없는 납북 어부들이나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주로 희생양이 되었다면, 1960년대에는 신문사, 방송사 사장 같은 막강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중앙정보부의 먹이가 되었다. 한국 사회는 이렇게 위로부터 길들여져갔다.

실체조차 없는 <경향신문> 간첩 사건


△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준구 당시 경향신문사 사장(왼쪽). <경향신문> 사건은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보다 더 악랄했다. (사진/ 경향신문 50년사)

중앙정보부는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을 두개의 간첩 사건과 연결지었다. 한 건은 당시 <경향신문> 체육부장으로 있던 이형백 사건인데, 이형백은 이 사건의 핵심인물이 아닌데, 이준구를 엮어넣기 위해 핵심인물인 것처럼 발표됐다. 이형백은 법정에서 자신이 이준구를 포섭할 엄두를 내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래도 이 간첩 사건은 이준구 부분을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지만, 실체라도 있었다. 실체조차 의심스러운 사건은 당시 <경향신문> 도쿄지사장이던 재일동포 윤우현을 핵심인물로 한 간첩 사건이다. 윤우현은 이준구가 구속되기 훨씬 전인 1964년 12월25일 가족과 함께 북송선을 탔는데, 중앙정보부는 윤우현이 모종의 간첩 사건과 관련해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들어오자 일본을 탈출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진실위원회가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당시 중앙정보부 도쿄파견관은 본부에 윤우현에 대해 일본 경찰은 윤우현이 일본 내에서의 간첩 사건에 관련됐다는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가 일본을 떠나 북으로 간 사실도 주일한국대표부의 통보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보고가 있었음에도 윤우현은 간첩이 되었고, 그를 도쿄지사장에 임명하고 지사장인 그에게 신문을 보내준 이준구는 간첩방조죄에 불고지죄가 더해진 것이다. 중앙정보부의 요인 동태 관련 문건에 사상관계에서 늘 온건, 건전, 민족주의 확고라는 평가를 받아왔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이준구를 잡아넣고 중앙정보부는 거래은행에 압력을 넣어 <경향신문>의 대출금을 회수하는 통지문을 보냈다. 이자만 제때 내면 상환일을 자동 연장해주던 관례를 무시하고 불과 2∼3일의 여유를 주고 대출금을 갚으라는 통고를 보냈다. 중앙정보부가 문안을 작성해주었는지라 3개 은행이 보낸 상환통지서는 금액과 날짜만 다를 뿐 본문은 토씨까지 똑같다. 국회에서 말썽이 나자 김형욱은 사장이 간첩죄로 잡혀들어가니, 채무자들이 불안해서 채권을 회수하려는 것이라 발뺌했다. 이렇게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신문사는 사상 초유로 경매에 부쳐졌다. 이준구의 부인 홍연수는 이 경매에 입찰해 <경향신문>을 다시 낙찰받으려고 입찰금을 준비했으나, 중앙정보부는 이 돈이 북에 간 윤우현에게서 온 것이라며 동결해버렸고, 1966년 1월25일 <경향신문>은 박정희와 동향으로 이 경매에 단독 입찰한 기아산업 사장 김철호에게 넘어갔다.

중정부의 협박을 녹음한 ‘여걸’

그러나 홍연수는 주식을 넘겨주지 않았다. <경향신문> 사태가 장기화되자 중앙정보부가 초조해졌다. 이준구의 구속 수사를 담당한 부국장 길모 검사는 이준구를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홍연수를 협박했는데, 여걸 홍연수는 길모의 협박 내용을 고스란히 녹음했고, 김상현 의원은 이를 국회에서 폭로했다. 지금 안기부 도청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한데, 천하의 중앙정보부가 오히려 한 여인에 의해 녹음을 당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준구 부부는 1966년 4월 <경향신문>을 포기했고, 이준구는 며칠 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부분은 무죄를 받고, 중앙정보부도 체면이 있으니 외환관리법만 선고유예로 하겠다고 김형욱이 약속한 그대로 형량을 받고 풀려났다. 홍연수에 따르면 이준구가 석방된 뒤 김형욱이 찾아와 “이게 다 위에서 시켜서 하는 짓”이라며 “당신 빨갱이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서 억울하게 빼앗겠느냐, 그거 빼앗아 5·16 장학회에 다 갖다줬다. 당장 가져오라고 해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향신문>이 공식적으로 5·16 장학회 소유가 된 것은 1974년이지만, 실상 김형욱의 말처럼 박정희 주머니로 들어간 것은 더 일찍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이런 불행한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다 보니 전두환이 나온 것이다. 정치정화법에, 부정 축재자 처리에, 깡패 순화교육(삼청교육)에, 언론사 통폐합에, 그리고 5·16 장학회를 모델로 한 일해재단까지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됐다. 김지태에게서 언론 3사를 빼앗고, 1962년에 인수하려다 실패한 <경향신문>도 결국 손에 넣고, 영남대학까지 갖추었으니, 박정희여, 그 얼마나 청렴한고? 이런 단단한 노후대책(?)을 마련해놓고도 무엇이 부족해 권력에 그리 연연하다가 총을 맞아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