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등록 2002.01.30(수) 제395호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딱지는 달라도 수법은 의구하네

다시 도진 ‘사회주의 모함’병…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모함당했나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또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빨갱이, 공산주의자라는 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나 일상화되어 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있음에도 이 나쁜 버릇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민주화의 진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 수구세력들의 위기감이 진전되면서 이 나쁜 버릇이 오히려 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무식하거나 혹은 야비하거나

수구세력의 빨간 딱지 붙이기는 가히 전방위적이다. 총선연대의 낙선운동도 사회주의적 운동이고, 지극히 자본주의적 발상에 입각하여 전개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도 자유시민연대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적 노선이다. 언론개혁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여름에는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논의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독자 여러분의 기억에도 생생하겠지만 언론개혁 문제는 또 어느 소신파 소설가에 의해 홍위병 논쟁으로 번져갔다. 의료개혁도 사회주의적 발상에 따른 것이고, 사학비리에 찌든 교육현실을 바로잡는 일도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일 뿐이다. 이 와중에 전교조는 가장 사회주의적인 집단이라는 훈장을 달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자본주의의 본고장에서 이미 일반화된 주5일근무제 역시 수구세력의 눈에는 사회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모성보호법의 제정 논의에서도 역시 사회주의의 망령은 예외없이 출몰했다.

지난 1월22일 한완상 교육부총리는 국무회의에서 ‘능력중심 사회실현을 위한 학벌문화 타파 추진 대책’으로 기업체의 입사서류에서 학력란을 없애겠다라는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사회주의병이 또다시 도졌구나 하는 생각에 당혹감을 금할 길이 없다”라는 성명을 냈다. 그는 이 성명에서 “한 부총리는 과거 통일부총리 재임 당시 이인모를 일방적으로 북송하는 등 친북행위를 일삼았으며, 교육부총리 취임 이전에도 북한노동당을 ‘형제’라 칭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서고, 북한을 주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등 ‘공명심에 들뜬 사회주의적 발상’을 반복해왔다. 취임 이후에도 ‘창발성’ 용어 사용 등으로 교육현장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린 바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정작 위에 열거한 사회주의 딱지가 붙은 내용들은 사실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조차 사회주의적 발상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김만제씨가 국내 유수 대학의 경제학 교수 출신에 국책 경제연구기관의 장을 오랜 기간 지낸 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몹시 우울하게 한다. 과연 김만제씨 등 한국의 매카시를 자임하고 나선 이들이 이런 사실을 몰라서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것일까? 아니면 알고도 정치적 이익을 노려 그런 주장을 한 것일까? 모르고 했다면 자신들의 무식함을 광고하는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이는 자신들의 야비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모는 병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발병하여 한국전쟁 이후에 도진 것이지만, 이 전가의 보도를 마련하기 전에 기득권 세력은 어떤 방법을 써서 반대파를 공격했을까? 특히 해방 직후에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짧은 시기이지만 공산당이 합법화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미군정당국의 여론조사를 보아도 대중의 여론이 사회주의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 시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빨갱이나 사회주의자로 몰아도 아무 효과가 없었던 시기였다.

우익 단체들 '분연히 궐기'하다.

1946년 1월5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된 조선임시정부 수립방안의 수용여부를 놓고 국내의 정치세력이 반탁과 찬탁으로 첨예하게 대립돼 있던 때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이 회견에서 박헌영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절대지지하며 조선의 현단계는 소비에트화 단계가 아니라 민주주의 변혁과정에 있다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내용은 다음날 <조선인민보> 등에 보도되었는데 박헌영이 늘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한 것인지라 별다른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나 10여일 뒤 미군정은 보도자료를 통해 1월15일 오전 7시5분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박헌영이 <뉴욕타임스> 특파원 리처드 존스턴(Richard Johnston) 기자에게 자신은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장래에 조선이 소련방의 하나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이 내용을 “조선을 소련 속국으로-상항(桑港)방송이 전하는 박헌영씨 희망”이라는 표제를 달아 크게 보도했다.

한편 한민당은 1월15일 즉각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박헌영의 발언은 “조선의 독립을 말살하고 소련의 노예화를 감수하는 매국적 행위”라고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에 박헌영은 이 기사가 사실무근임을 주장했다. 박헌영은 미국 기자가 그렇게 보도한 것은 아마도 언어관계로 오해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했다. 박헌영은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통역을 쓰지 않고 본인이 영어로 직접 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의 이런 해명이 우익의 공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오늘날과 달리 불편부당의 사시(社是)에 충실하게 샌프란시스코 방송의 보도 내용과 박헌영의 해명을 같이 실었다. 그러나 한민당의 기관지로 간주되던 <동아일보>는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다. 당시에 오늘날의 <조선일보>와 같은 역할을 한 신문으로는 악질 친일파 이종형이 발간한 <대동신문>이 있었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동아일보>는 논쟁을 선도했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애국지성에 오로지 자주독립만을 염원하는” 한국민주당, 국민당, 반탁국민총동원 경성지부,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 반탁전국학생총련맹, 국민반탁총동원중앙위원회, 독립촉성중앙위원회 등 51개 단체가 ‘분연히 궐기’하여 16일 오후 한민당 본부 내에서 매국적징치 각단체긴급협의회(賣國賊懲治 各團體緊急協議會)를 결성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 타도 국민대회와 성토강연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 단체들은 또 미군정에 박헌영의 언동은 매국적 행위임으로 그 일파와의 면회, 방송성명 등 일체 정치행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각 신문통신에 대해 박헌영 일파의 선전에 대한 취급을 불허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즉 이들은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해명을 하더라도 그것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신문과 통신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한편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1월16일치는 박헌영이 존스턴이 문제의 기사를 미국으로 타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1월12일 존스턴을 찾아가 문책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어 <해방일보>는 1월18일치에 ‘박 동지를 무고하는 음모배 한민당 간부는 사과하라’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장문의 성명을 게재했다. 이 성명에서 조선공산당쪽은 이번 소동이 “수십년간 감옥에서 지하에서 조선민족의 절대독립을 위하여” 투쟁해온 혁명가들을 과거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모해하는 상투적인 수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좌익계의 <조선인민보>는 1월19일치로 문제의 내외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국내의 12개 신문 및 통신사 기자 일동의 명의로 된 성명을 실었다. 이 성명에서 참석 기자들은 박헌영이 소련의 한 연방으로 조선이 참가하기를 희망한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보다 앞서 <서울신문>은 1월17일치로 같은 회견에 참석한 미군 기관지 의 기자인 현역 군인 로버트 콘월(Robert Cornwall)이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외신기자들과 박헌영 사이에 오간 문답록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그는 박헌영이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을 원한다고 말했을 뿐 소련 일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나 조선의 소련 연방 편입 등의 발언을 듣지 못하였다고 보도했다.

왜곡된 보도, 그러나 뜻깊은 보도?

이렇게 좌우익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문제의 존스턴 특파원은 국내 기자들과 만나 조선공산당쪽의 주장을 반박하는 회견을 가졌다. 신문기자가 취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취재의 대상이 되는 드문-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사상논쟁 시비와 관련하여 종종 볼 수 있는- 사례였다. 이 회견에서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마음에 들어하는 몇 안 되는 언론인었다는 존스턴은 박헌영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당신들은 영어를 잘 알아듣느냐”고 물었다. 기자들이 잘 모른다고 답하자 존스턴은 “박씨가 나와는 영어로 말하였으니 당신네들은 몰랐을 것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뉴욕타임스>는 정확한 사실만 보도하는 신문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1월20일 “<뉴욕타임스>에 오보는 없다”라는 제하에 이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존스턴이 이렇게 강수를 두자 박헌영은 1월26일 미군정 당국에 대해 허위보도를 일삼는 존스턴 기자를 조선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공식서한을 제출했다.

그러나 미군정쪽의 내부보고서를 보면 미군정 당국은 존스턴의 기사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미군정 당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헌영은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했으며, 그의 발언은 “완전히 왜곡되어 보도”되었다. 이남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정치동향’이라는 보고서의 작성을 담당하던 버치 중위는 군정청 홍보국장 뉴먼 대령에게 존스턴의 보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정정기사를 써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뉴먼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군정사령관 하지 역시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존스턴의 보도가 매우 뜻깊은 것이기 때문에 그 보도내용을 정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 당국은 이 문제가 거의 잊혀져가던 2월18일 공보국 명의의 발표를 통해 존스턴을 비호하고 나섰다. “미국인 기자에 대한 비난을 풀기 위하여 다음의 기사를 발표하는 바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발표문에서 미군정 당국은 박헌영이 “소련 일개국 신탁통치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답변했고, 장래 조선의 정치발전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소련화(蘇聯化)한 사회주의적 노선에 따라 10년 내지 20년 안에 자주독립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되기를 바란다”고 답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존스턴은 “이것은 결국 가까운 장래에 조선을 소련방의 일련방으로 하고자 조선을 소련화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박헌영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불가능하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발표문은 존스턴 기자가 박헌영의 기자회견 내용을 잘못 인용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이 발표의 시점으로 보아서 미군정의 의도는 존스턴을 비호한다기보다 잊혀져가는 이 문제에 다시 불을 지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대변자 이미지에 타격을 가하라”

필자는 해방 직후 박헌영이 보인 정치적 능력이나 지도력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지만, 그가 세살먹은 어린애가 아닌 이상 설혹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조선이 소련 연방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미국 기자들에게 했을 리는 만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미군정의 내부문서에서는 존스턴의 기사가 왜곡된 것으로 나와 있는 점을 보아도 박헌영은 미군정 당국과 우익언론의 결탁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뉴욕타임스>는 박헌영이 조선이 소련 연방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적이 없음에도, 국내에서는 미군정의 개입에 의해 마치 이런 기사가 보도된 것처럼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뉴욕타임스>에 오보는 없다는 말은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합법화되어 있던 시기에 우익세력과 그들의 배후에 있던 미군정이 언제,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모함했는가이다.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을 압도하면서 빠르게 대중 속에 기반을 확대해갔다. 그런데 이런 사회주의자들의 독주에 제동이 걸리고, 좌우익간에 팽팽한 대립구도가 형성된 전기가 된 것은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태도문제, 즉 흔히 신탁통치논쟁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는 점은 사회주의자들이 행사한 주도권의 성격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익진영, 특히 임시정부는 조선의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자주독립을 주장한 반면, 사회주의 진영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5년간의 신탁통치를 수용했다. 우익은 좌익진영의 갑작스런 태도변화를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몰아붙였다.

우익진영이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장차 조선을 소련연방의 일원으로 삼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선전한 것은 바로 이 논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지만 좌익진영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신탁통치 논쟁, 그리고 박헌영의 조선의 소련연방 편입주장 소동으로 인해 좌익진영이 입은 정치적 손실은 해방 직후의 사회주의 진영의 대중적 지지기반이 사회주의 이념의 호소력보다는 사회주의자들이 지닌 민족이익의 대변자로서의 성격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기보다는 민족해방운동에 좀더 충실했던 세력이었으며 자주독립의 옹호자였기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논쟁을 계기로 친일파를 포함한 우익은 민족 대 반민족의 구도로 전개되어온 식민지 시기 이래의 정치지형을 좌익 대 우익의 대립으로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우익은 사회주의자들이 거의 배타적으로 향유해온 민족적 대변자로서의 위치에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역전 과정에서 미군정이라는 외부적인 요소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익의 위기탈출

공산주의자들의 합법적 활동이 보장되었던 해방 직후의 시기에 좌익과 우익은 누가 더 민족적인가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그때 우익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언론의 왜곡보도를 통해 좌익을 공격했다. 일제 강점기의 마지막 시기에 좌익에 비해 친일활동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우익에게 친일이라는 딱지는 원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우익은 신탁통치 논쟁의 과정에서 좌익을 매국노로 몰면서 이 위기를 탈출했다.

그리고 이남 단독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의 사회주의자들을 멸종시켰다. 지금 아무 데나 사회주의 딱지를 붙이는 21세기의 매카시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시기에 어린 나이였다. 어쩌면 그들은 세계적으로는 너무나 널리 분포하지만, 이 땅에서는 멸종된 사회주의자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무 데나 사회주의의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공산주의가 합법이었던 아주 짧았던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은 매국노로 몰렸고, 공산주의가 불법화된 오랜 시기에 이 땅의 민주개혁 인사들, 아니 민주나 개혁을 들먹일 필요없이 극우파가 서 있는 지점보다 조금이라도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렸다. 붙여진 딱지는 비록 다르지만, 그 수법은 의구할 뿐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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