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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특집 > 기획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6월28일 제6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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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공안은 납치를 사전에 알았다”

일본에서 확인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의 풀리지 않은 의혹들… 가와베 공안 전문기자 “자위대도 관련돼”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독재 투쟁을 벌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대낮에 납치된 사건은 국제적 뉴스거리였다. 김씨는 사건 발생 5일 만인 8월13일 밤 자택이 있는 서울 동교동 인근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납치범들의 정체, 구명 과정 등에 얽힌 의문점은 해소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음에도, 한-일 정부는 73년 11월 김종필 총리의 방일(1차)과 75년 7월 미야자와 기이치 외상의 방한(2차) 등을 통해 사건을 그냥 덮기로 최종 합의했다. 두차례에 걸친 이른바 정치적 ‘결착’이다.

34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오충일)의 조사 결과 발표를 놓고, 다시 한 번 한-일 양국 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진상규명위는 애초 납치사건 조사를 내부적으로 마무리하고, 지난해 7월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공식 발표를 계속 미루고 있다. 한겨레신문사는 김대중 사건에 대한 일본 외무성의 공식 입장을 듣기 위해 지난 5월 말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외무성은 일본 언론의 취재 요청에 대해서도 함구를 하고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의 무거운 짐을 진 진상규명위가 국내외의 유·무형 압력을 뿌리치고 언제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조사 결과를 발표할지 주목된다. 김효순 <한겨레> 대기자가 지난 6월5∼11일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이 만들어낸 한-일 정부의 오랜 ‘정치적 결탁’을 추적했다. 편집자

▣ 도쿄·오사카=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 유력한 야권 정치인이던 김대중씨가 1973년 8월 망명생활을 하던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됐다가 5일 만에 서울 동교동 집 앞에 버려진 뒤,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 보도사진연감)

일본 <아사히TV>는 지난 6월10일 일요 시사프로 <더 스쿠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특집으로 다뤘다. 34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40대 초반까지의 세대만 해도 이 사건 자체를 거의 모른다. 중간 삽입광고를 빼면 약 40분 분량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보면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발생 뒤 사건의 전개, 관계자들의 증언과 평가 등을 짧은 프로에 담느라고 제작진이 고생한 흔적이 역력히 느껴졌다.

외무성 간부의 은폐 ‘지침’

<아사히TV>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소수의 전문가나 관련 당국을 빼고는 관심의 대상에서 사라진 이 주제에 대해 왜 갑자기 특집을 만들었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마이니치신문>의 전 서울 특파원 후루노 요시마사(71)가 올해 초 펴낸 <김대중 사건의 정치적 결착>이란 책이다. 73년 봄 3년 임기로 서울에 부임한 후루노는 납치사건이 발생한 그해 8월8일 본사의 취재 지시를 받아 김대중씨의 동교동 집으로 달려갔다. 그가 동교동 집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에 한국 기자들은 물론이고,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었다. 김대중 사건의 진상을 끝까지 파헤치려는 그의 평생 작업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후루노의 저서는 그가 사건 당시 작성한 취재 메모와 꾸준히 모은 자료에다, 지난해 한국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방대한 관련 문서 등을 면밀히 분석해 완성한 것이다. 그의 책에는 “실제로 외교문서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현들이 자주 나온다. 일본 외무성의 간부가 “한국 쪽에 ○○기관의 관여가 없었다고 끊임없이, 명확히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진상 은폐 ‘지침’을 주거나, 김대중씨의 ‘원상회복’을 요구하기도 전에 여러 가지 타협책을 제시하는 대목 등에서다. 그는 당시 한-일 양국의 교섭에 대해 “한국 정부가 상대의 카드를 알고 브릿지(카드도박)를 치는 격이었다”며 “외무성이 반론을 하기 위해 일본 쪽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한 외무성의 오점은 세계 외교사에 남을 것”이라고 신랄히 비판했다.

<아사히TV>의 특집 프로그램은 일본 정부의 석연치 않은 정치적 봉합에 대한 후루노의 문제 제기에 자극받아 만들어졌다. 취재팀은 그의 책에 등장하는 생존인물을 모두 인터뷰하려 했으나, 실제 카메라 앞에서 입을 연 사람은 극소수다. 생존자 중 당시 뒷거래 내용을 가장 많이 알 만한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2차 결착 때 외상) 등은 병을 핑계 삼아 인터뷰를 거절했다.

취재팀이 이번 프로에서 최대 성과로 자부하는 대목은 나카에 요스케(85)와 한 인터뷰이다. 나카에는 납치사건 발생시 외무성 아시아국 국차장으로, 고비 때마다 실무협상을 조율했다. 한국 정부가 중앙정보부의 관여가 없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도쿄주재 한국 외교관들에게 ‘코치’를 한 당사자다. 그의 머릿속에는 김대중은 “일개 외국인”, 납치사건은 “하찮은 일”로 저장돼 있다.

“일개 외국인” “하찮은 일”

유고슬라비아와 중국 대사까지 지낸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 외교문서에 기록된 자신의 발언에 대해 “대체로 그랬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당시로서 일본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당당히 말했다. 그는 주권침해 논란에 관해서는 “일본에서도 1년 내내 납치,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일개 외국인’이 일본에서 납치됐다고 바로 주권침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그는 “당시 김대중씨의 ‘원상회복’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며 “한-일 국교 정상화가 겨우 이뤄져 협력해나가야 할 때, 이런 ‘하찮은 일’로 여론이 들끓는 상황을 언제까지 내버려둬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뉴스 캐스터 도리고에 타로는 “인권보다 국익이 중요했다는 것이 당시 외무성 전체의 인식이었으며, (그런 측면에서) 김대중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 전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김대중 납치사건의 파장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1973년 9월23일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을 출석시킨 가운데 사건에 대한 질의를 벌이고 있는 국회 본회의장 모습.(사진/ 연합)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많은 의혹이 남아 있으며, 뒤처리가 말끔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풀리지 않은 대표적인 의혹으로 일본 공안경찰의 사전인지설과 자위대 관련설을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일본 당국이나 경찰의 공식 해명은 “사전에 전혀 몰랐고 사건 신고를 받은 후에도 갈피를 잡지 못해 범행의 윤곽을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범행이 알려진 직후 도쿄 주변을 중심으로 주요 간선도로에 비상경계를 펴 검문에 나섰다면 납치범들의 국외 탈출을 막을 수 있었다”며, 경찰의 어설픈 초기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애초 현장에 유류품들이 널려 있는데도 수사의 돌파구를 열지 못했던 일본 경찰은 마침내 도쿄 주재 한국대사관의 김동운 1등 서기관을 납치범의 한 명으로 지목해낸다. 중앙정보부 요원인 김동운이 외교관으로 ‘변신’하기 전 어느 신문 특파원 자격으로 일본에 입국할 때 찍었던 지문이 외국인등록 서류에 남아 있어 그가 범행에 가담한 정황을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김동운의 용의점을 파헤치려던 일본 경찰은 결국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주권침해’ 소지가 있는 중대한 사건을 불문에 부치게 되자, 일본 경찰 조직 내에서 ‘불명예스런 처리’라며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이 정도가 김대중 납치사건 수사와 관련해 대외적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통설을 송두리째 뒤집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공안경찰이 김동운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며,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서는 사전에 통보까지 받았다는 주장이다. 공안경찰과 김동운의 내막에 대해 확신을 갖고 얘기하는 사람은 정보와 공안 문제 전문기자인 가와베 고쿠로(53)다. 온화한 인상을 지녀 냉혹한 스파이·정보 세계를 깊이 취재했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력을 보면 발언에 상당히 무게가 실려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의 경찰> <납치는 왜 막을 수 없었나- 일본 경찰의 정보패전> 등 이 분야에 대한 저서도 있다.

끈적끈적한 관계의 중심, 김동운

가와베는 1978년 <마이니치신문> 계열의 방송사 〈TBS〉에 입사해 경시청 담당반장, 사회부 데스크(사건·사고 기사 책임자), 보도특집 부부장을 거쳤으며 지난 96년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나와 월간지 <세카이> 등을 중심으로 심층보도를 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 언론에서 ‘사회부 간부’를 키우는 방식은 이렇다. 우선 경찰 공안부서와 방위청 취재를 맡겨 훈련을 한 뒤 사회부 데스크, 부장으로 승진시킨다. 일본의 공안은 한국 경찰과 위상과 힘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한국에서는 경찰조직 위에 군림하는 여러 정보기관들이 많아 경찰의 대공·외사 분야를 한 수 접어두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의 공안은 일제 시대 내무성 직속이었던 사상경찰, 즉 ‘특고’의 흐름을 잇는 무서운 조직이다.

가와베는 자신을 “공안기자 마지막 세대”로 소개했다. 공안을 취재하려면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동 등 세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이전의 공안기자들은 60년대 안보투쟁, 70년대 좌익 적군파 등을 취재하며 경험을 넓혀왔는데,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런 기자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일본이 83년 8월 김대중 사건 수사본부를 사건 발생 10년 만에 해체한다고 발표했을 때, 가와베는 경시청을 출입하는 공안 담당 기자였다. 그 뒤에도 일본인 납치사건, 일본 공안과 한국 중앙정보부의 막후 관계를 꾸준히 파고든 그는 “일본 공안과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이 적어도 ‘바닥’의 실무진 차원에서는 끈적끈적한 관계였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공안이 김대중 납치사건 직전 몇 건의 북한 스파이 관련 사건을 적발했는데 대체로 중앙정보부가 넘겨준 자료를 토대로 사건화한 것들”이라고 밝혔다. 공안 쪽에서 보면 중앙정보부의 ‘의뢰’로 스파이망을 적발하면, 경찰 내부의 평가도 좋고 대외적으로도 점수를 따기 때문에 한국 기관과의 협력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런 끈적끈적한 관계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김동운 1등서기관이다. 가와베는 “일본 공안 현장 요원들은 김동운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통해 한국 요원들이 김대중을 납치하려 한다는 것을 사건 발생 거의 한 달 전쯤에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깜짝 놀란 공안이 ‘그런 짓을 하면 큰 외교 문제가 되고 일본 경찰의 체면이 통째로 망가지니까 하지 말라’고 설득 겸 경고를 했는데 김동운 일당이 그예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해서 공안 경찰로부터 항의나 명예훼손 소송 위협을 받은 적이 없느냐는 물음에, 가와베는 “오랜 기간 일본 적군파 사건 등 공안 분야를 다뤄와 당국과 가락을 맞추는 방법, 처신 방식, 방어 방법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한국 쪽에서도 표적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도 들려와 여러 가지 조심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안 당국의 내부 정보를 알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공안 당국 내부에서도 정치적으로 덮어버린 사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이들이 일부 있다. 그들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막지 못한 것을 씻을 수 없는 수치로 생각하고 있으며, 김대중 사건을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덮어버린 것이 결과적으로 (일본인 납치사건 같은) 북한 공작원들의 만행을 유도했다는 부채 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공안이 그냥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변명 같은 것을 하고 싶어한다.”


△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지난해1월 ‘동백림 사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진상규명위는 지난해 7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이제껏 공식발표를 미루고 있다.(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자위대 출신 흥신소 요원이 감시활동

그의 설명을 들으면 ‘자위대 관련설’도 어느 정도 해명이 된다. 납치사건이 일어나기 전 ‘밀리언정보서비스’라는 자위대 출신 흥신소 요원들이 등장해 김대중씨 감시활동을 하는데, 이들도 김동운의 일본 내 협력자 그룹이어서 특별히 이상한 요소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김대중씨를 미행하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모습도 몇 차례 공안 당국의 감시 카메라에 찍혔다. 그래서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김동운의 범행이라는 것은 공안 내부에서 바로 알았다는 게다.

가와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단편적 사례는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사건 당시 경찰청 장관이었던 다카하시 미키오(1917~89)의 발언이다. 74년 10월 퇴임한 그는 76년 여름 긴키지역 경찰관 모임이 주최한 하계강좌에 참석해 “(김대중 납치사건은) 공식적으로는 KCIA(중앙정보부)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하지만 KCIA가 벌인 일이 틀림없다”며 “김동운이라는 자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 녀석이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기관지에 실려 국회에서 논란이 되자 경찰 간부들은 발언이 왜곡 전달됐다고 불을 끄느라 분주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 공안과 한국 중앙정보부의 협조관계는 공식적으로 단절됐다가, 84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때 경호 문제와 87년 12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으로 다시 전면 협력관계로 돌아섰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 수뇌부는 공안 쪽 보고를 통해 사건 전 또는 적어도 사건 직후에 한국 중정요원들의 범행을 알았을 텐데 왜 철저히 추궁하지 않고 그냥 덮어버렸을까?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 쪽 처지에서 보면 엄연히 ‘주권침해’ 사건이다. 60년대 말 동베를린 사건 당시 서독 정부가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의 독일 체류 한국인 강제 연행에 격분해 경제협력 중단과 국교 단절 불사까지 경고했던 것과 비교하면, 일본 정부의 낮은 자세는 불투명한 구석이 많다. 시각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식민국가의 도덕적 부채론, 미국의 개입, 일제 때 만주 인맥, 한-일 경협의 칙칙한 유착, 거액의 정치자금 제공설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법학부장은 “한국 사람들은 식민지 시대 피해자 입장이어서 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한-일 관계는 이스라엘-독일 관계와 비슷하다”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본이 한국에 요구할 수 있는 한계 같은 것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이 진상을 철저히 추궁해 사죄하게 하는 방식이 과연 가능했겠느냐”고 의문을 표시하고, “일본 정부는 도리어 한국 쪽에서 엄청난 반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치카와 하야미(46) <아사히신문> 전 서울지국장은 “정치인들의 압력에다 미국의 의사가 작용해 외무성이 원칙적 자세를 굽혔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당시는 냉전의 파도에 휩쓸려 있던 시기라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이 문제로 서로 다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란 게다.

왜 ‘주권침해’를 그냥 덮어버렸나

반면 가와베는 오히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전쟁 전의 일본 군부 출신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박 전 대통령은 만주사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사를 졸업해 군 인맥으로 일본과 연결돼 있다. 실제로 73년 11월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방일로 이뤄진 ‘1차 정치적 결착’에 앞서 양쪽 외교 분야의 공식 협상 통로를 제치고 등장한 것이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던 기시 노부스케와 그 산하 인물들이다. 기시는 만주국 건설의 핵심이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에 상공상으로 참여했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수감됐다가 50년대에 총리 자리까지 오른다. 아베 신조 현 총리는 기시의 외손자다. 후루노의 저서 <…정치적 결착>에는 기시가 당시 한국에 올 때마다 국빈 대접을 받았고 흰색 오토바이가 배치돼 경호를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기시 파벌은 한-일 경협자금 집행에도 깊이 간여해 자민당의 다른 파벌로부터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치적 결착을 설명하는 단골메뉴로 거액의 정치자금 제공설을 빼놓을 수 없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정계의 거물 브로커인 오사노 겐지 국제흥행 사주를 통해 다나카 총리에게 3억엔을 보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이병희 당시 정무장관이 직접 돈다발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다나카의 사저로 찾아갔다는 설이다. <요미우리신문> 회장을 지냈고 지금도 주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본 언론계의 거물 와타나베 쓰네오(81)는 회고록에서 “오사노가 다나카에게 건넨 돈은 40억엔에서 60억엔에 이르는 것으로 들었다”고 썼다. 이 막대한 정치자금에 박정희가 보냈다는 돈이 포함돼 있는지 여부를 밝힐 단서가 도쿄 지검 특수부와 일본 경찰의 X파일에 담겨 있을지, 있다면 언제쯤 햇빛을 보게 될지 관심이 쏠린다.

● 666호 주요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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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고 ‘빽’ 없다면 쇼를 하라
▶‘666호’라고 두려워 말라
▶질문하는 경영자가 성공한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주식투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