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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특집 > 이슈추적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02월15일 제5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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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학살, 경찰이 방관했다

1950년 경남 사천의 끔찍한 참극을 증언하는 국회 현지보고서 발굴
비토섬에서 충돌 벌어지자 현장 감시하던 경찰들은 슬그머니 자리 떠

▣사천 비토리섬=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마을을 찾은 것은 정확히 1년 만이다. 그때 마을 이장 지명석(70)씨는 “쓸데없이 옛날 일을 들추려 한다”며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다. 그때까지 한센인 사회에서 ‘학살’의 기억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철저한 금기로 여겨졌다. 그는 48년 만에 입을 열었고, 1957년 8월28일 오후 반나절 동안 그가 겪은 비극은 2005년 2월5일치 <한겨레> 6면에 ‘한센병 환자들…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역사’라는 제목의 기사로 세상에 전해졌다.


△ 조희상씨는 그날 학살로 만신창이가 됐다. 그의 얼굴은 그날 입은 상처로 뒤틀린 모습이었다. 조씨는 "괭이에 맞고 쓰러져 내가 왜 안 죽었는지 나도 모른다"고 말했다.

국가 공식문서로 확인된 건 처음

경남 사천 비토섬에서 있었던 한센인 학살의 역사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 전란을 피해 삼천포(현재 사천)로 내려온 한센인 40여 명은 1950년 비토섬에서 남동쪽으로 3km 떨어진 경남 사천군 실안동 일대 해안에 영복농원을 세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구가 200명으로 늘었고, 농원은 넘쳐나는 사람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 이장은 “그때 마을 총무였던 허판개씨가 ‘농토가 없으니 바다 건너 섬으로 가 고구마와 보리를 심자’고 제안해 환자 60여 명이 동냥하러 다닐 때 쓰던 배 3~4척을 몰고 바다로 나갔다”고 말했다. 한센인들은 비토섬에 군용 천막을 치고 산비탈을 깎아 개간을 시작했다. 섬의 비옥한 황토흙은 환자들의 쟁기질로 단번에 밭으로 변했다. 섬 사람들의 반발이 시작됐다. 1957년 8월28일 오후 3시께 섬 위·아래 마을 주민들과 바다 건너 서포면 사람 300여 명이 한센인들의 정착에 반발해 징·막대기·죽창·삽·곡괭이로 무장하고 천막을 습격했다. ‘투석전’이 잠시 이어지다, 수에서 밀린 한센인들이 천막 안으로 도망갔다. 한센인들을 천막까지 쫓아간 습격자들은 천막을 무너뜨린 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간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창과 몽둥이였다. 그날 주민들의 습격으로 한센인 27명이 숨을 거뒀다. 그날 남편 정치일씨를 잃은 박성연(87) 할머니는 “그때 죽은 남편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며 “가해자 쪽에서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지금껏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마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조영황 국가인권위원장이 그동안 국가가 한센인들에게 저지른 인권 침해에 대해 공식 사과했고, 한센인들이 당한 피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한센인 특별법’(국회의원 62명 공동발의)이 국회에 상정돼 있다. 그런가 하면 “억울하다”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던 박성연 할머니가 지난해 3월 숨졌고, <한겨레21>의 취재 결과(<한겨레21> 9월6일치 특집기사 “문둥이들 다 죽여버려”) 해방 이후 한센인 학살이 전국에 걸쳐 보편적으로 이뤄졌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뜻밖에도) 국가인권위원회의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 결과 비토섬 한센인 학살의 전모를 보여주는 당시 국회(민의원)의 현지 조사 보고서가 국가기록원에서 발견됐다. 한센인 학살 사건이 국가 공식 문서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지명석 이장(왼쪽)은 문서를 한자한자 살펴보며 가슴을 쳤다. 그는 "우리 말이 결국 사실로 밝혀진 셈"이라고 말했다.

“섬에 들어간다” 예고 했으나…

전북 장수의 3대 민의원(무소속)이었던 정준모 전 보건사회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서울을 출발한 것은 사건이 터진 뒤 19일이 지난 단기 4290년(1957년) 9월16일이었다. 이들은 3일 동안의 조사를 끝내고 서울에 올라와 같은 해 10월26일 ‘나환자와 사천군 비토리 주민과의 충돌사건에 관한 조사보고’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보고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보고서는 주민들의 증언으로 전해진 사건의 전모가 대부분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를 보면, 당시 영복농원의 인구는 281명으로 1인당 하루 3홉씩의 구호미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식량이 부족한 주민들은 1956년 11월 농림부 장관의 ‘귀속임야 임대방침’에 따라 비토섬의 귀속임야 22정보(1정보는 3천 평)를 개간해 농사를 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경남도는 한센인들의 땅 개간 계획을 승인하지 않는다. 경남도는 1957년 7월12일에 한센인들이 낸 땅 임차 신청을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5일 만에 물리쳤다. 경남도가 내세운 ‘땅 임차의 자격’이 뭔지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정부는 한센인들을 외면했지만, 그들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한센인들은 삼천포시장, 농업은행 삼천포 지점장 등과 함께 삼천포 경찰서장을 찾아 “비토섬 입도를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서장은 “합법적 행위에 대해서는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그 말이 기자에게는 “밥 먹으니 배부르다”처럼 무내용하게 들렸지만, 50년 전 한센인들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쁨이었는가 보다. 그들은 같은 해 8월8일 섬으로 들어갔다가 하루 만에 쫓겨나온 뒤, 8일 뒤인 8월16일 삼천포경찰서와 삼천포경찰서 서포지서에 “입도하겠다”고 예고했다.


△ 학살이 일어났던 터에 이름 없는 무덤 한기가 자리잡고 있다. 너른 남해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서늘했다. 현장에 학살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한센인들이 다시 섬에 들어간 것은 같은 해 8월22일이었다. 경찰은 한센인들을 불러 “8월27일까지 섬에서 나가라”고 경고했다. 한센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경찰과 섬 주민들이 찾아와 공포 3발을 쏘며 위협했다. 보고서는 “(섬) 주민들은 나환자가 입주하게 되면 나질환의 전염도 가공하려니와 그들의 생활근거가 되는 개척 가능한 토지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그보다도 더 큰 위협은 주민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굴 양식에 대한 영향을 우려하는 데 있다”고 적었다. 지 이장은 “그들이 우리를 죽인 것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이 느꼈을 불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타는 텐트, 탈출하면 죽창질

결국 일주일 만에 일이 터졌다. 한센인들이 섬에서 나가길 거부하자 주민 100여 명은 준비한 죽창·농기구·돌덩이를 들고 8월28일 한센인들을 찾았다. 말다툼 끝에 투석전이 벌어졌고, 출동한 경찰이 주민들을 흩었다. 오후 1시가 되자 현장을 감시하던 경찰이 슬며시 자리를 떴다. 조사단은 이에 대해 보고서에서 “현지 행정당국자인 서포면장과 당시 서포경찰서지 주임 및 차석 등이 주민들의 폭거에 대해 약간 방관적 태도를 취한 듯한 점이 없지 않다”고 적었다.

그때 섬 주민들에게 맞아 턱이 부러진 조희상(83)씨는 “아직도 그때 일이 어제처럼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그는 경남 하동 출신으로 20살 때 병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일제에 강제 징집돼 군사 훈련까지 다 받은 뒤에 집으로 보내졌다. 신체검사 결과 병이 확인된 것이다. 그는 1956년 그믐에 고향에서 동갑내기 박점득 할머니와 결혼해 마을에 정착했다.

“저놈들이 100명 넘게 시커멓게 모였더라고. 징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니까 환자 몇 명이 돌을 던지며 저항했어. 그렇지만 그런 일이 터질 줄 우린들 알았겠나.” 무장이 안 된 한센인들은 소나무숲 언덕에 세운 텐트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주민들이 텐트를 무너뜨리고 천막 안으로 죽창질을 시작했다. “난 처음에는 아래 깔려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밀려 위로 올라왔지. 무릎 사이로 죽창이 비집고 올라오더라고.” 주민들은 엎어진 텐트에 불을 붙였다. 누군가 “산 사람은 나가라”고 소리쳤다. 조씨는 바닷가로 도망쳤다. 3~4명이 죽창과 돌을 들고 쫓아왔다. 그는 돌에 엉덩이가 찍혀 넘어졌다. 이번엔 얼굴이 돌에 찍혔다. 턱이 네 동강으로 깨져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물가로 끌려나왔다”고 말했다.

누군가 “느그들 춥지”라고 물으며 조씨를 불가로 데려갔다. 불 속에서 주검이 타고 있었다. 한센인들은 하나씩 무릎이 꿇린 채로 괭이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조씨는 “그때 날이 빗맞아 목숨을 부지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할머니는 “얼굴로는 구분할 수 없어 평소 들고 다니던 고무줄을 보고 남편을 알아봤다”고 말했다. 조씨는 남자들 밥해주러 섬으로 들어갔던 형수 김쌍이씨와 육촌 동생 조덕상씨를 이날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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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문서가 나온 우리는 행복”

이날 상황에 대한 보고서는 “저항을 못하고 천막 내로 은신하는 환자들 중에서 12명을 색출 포박 연행해 석괴(돌멩이)와 죽창 농구 등으로 자격(찌르고), 타박을 가해 두개골 개방, 골절 및 뇌내출혈 등에 이르게 하여 현장에서 수명을 살상하고 다시 천막끈을 끊어 덮어씌운 위에서 역시 자격·타박·방화 등으로 가해해 합계 22명을 즉사케 하고 행방불명 2명, 중상자 33명, 경상자 23명의 환자를 발생시켰으며 중상자 중에서 가료 중 2명이 사망하고 잔여 환자는 영복원에서 삼천포 보건진료소 의사의 가료하에 점차 치유 중에 있다”고 적었다.

사건 이후 일을 저지른 피의자들은 1958년 1월28일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김아무개 외 4명은 징역 3년, 민아무개 외 5명은 징역 2년, 손아무개 외 31명은 집행유예 3년 등의 형을 받았다. 보고서의 표현대로 “무저항 상태에 있는 나환자를 왕년에 공산당이 양민을 학살하던 그러한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존귀한 20여 명의 생명을 현장에서 즉사케” 한 죄에 대한 처벌치고는 관대한 처분을 받은 셈이다. 지 이장은 “문서가 나온 우리는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말했다. 기록되지 못한 다른 죽음들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묘지에 추모비나 세워 다오”

[인터뷰_ 지명석 이장]

후손에게 남은 감정은 없어, 그때 일을 정확히 알려줬으면…

지명석 이장은 비토리섬 학살 사건에 대한 정부 문서가 발굴됐다는 소식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이제 우리 주장이 100% 맞다는 것이 인정된 것이냐”고 물었다. 보고서는 “한센인들이 허가 없이 섬을 개간한 잘못은 있지만, 존귀한 생명을 천인공노할 방법으로 죽인 주민들과 이를 사실상 방조한 경찰과 행정당국이 무책임·무능력했다”고 질타하고 있다. 그는 “국가에서 우리에게 사죄하고 그때 죽은 사람들의 공동묘지에 추모비를 하나 세워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서를 본 느낌은 어떤가.

=보고서에는 “우리가 땅을 개간할 허가를 못 받았다”고 돼 있는데, 그때 나는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당시 가해자들에게 처벌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건 이후 국가가 그 사건에 대해 우리에게 정보를 전해준 것이 전혀 없다. 우리는 풍문으로 3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건뿐 아니라 사후 처리에서도 한센인들이 철저히 배제됐던 것 같다.

보고서는 사건 책임을 주민들의 폭력을 방조한 경찰 당국에 돌리고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때 나는 텐트에서 바로 소나무숲으로 도망쳐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들이 빠져나간 뒤 주민들이 들이쳤다. 우리는 경찰이 주민들과 짜고 이번 사건을 눈감았다고 생각한다.(보고서는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을 당시 삼천포 서장과 서포지서장에게 돌리고 엄중히 조사해 그 책임을 철저히 가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미 오래 지난 일이기 때문에 그때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이나 그 후손에게 남은 감정은 없다. 다만, 그때 일을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줬으면 좋겠다. 주민들의 주검을 화장해 마을 뒷산에 가져다 묻었다. 후손이 없어 방치된 무덤이 많다.(그때 숨진 최자경씨 무덤 위에 꽃이 놓여 있었다. 지 이장은 “딸이 일본에 있는데 엊그제 왔다”고 말했다.) 그 묘지에 국가에서 지난 학살 사건을 방조한 데 대한 사과문과 함께 추모비를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 우리의 마지막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