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영화 <매트릭스>는 여러 가지로 재미있다. 첨단 촬영기법에 의한 다양한 액션,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환상적인 화면, 그리고 “현실 공간과 사이버 공간 가운데 어느 것이 ‘정말 진짜’인가”라는 철학적 질문 등이 잘 어울려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중요한 요소 한 가지를 놓치기 쉽다. ‘매트릭스’란 제목이 그것으로서,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정작 매트릭스가 무엇이고 어느 대목에서 나오며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 등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친다.

매트릭스(matrix)의 어원은 ‘모태’ 또는 ‘자궁’이다. 그리하여 무엇인가를 안거나 담고 있는 것, 바탕을 이루거나 배양하는 것 등을 나타낸다. 수학에서는 ‘행렬’의 뜻으로 쓰이며, 일정하게 배열된 수를 괄호 속에 담고 있는 표현을 보면 그 이유를 곧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노벨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의 업적은 단백질의 질량 결정법이다. 그는 미세한 금속 분말이나 유기화합물 위에 붙어 있는 단백질 분자에 레이저를 쬐어 낱개로 떼어냄으로써 그 질량을 측정할 수 있었다. 여기서 금속 분말이나 유기화합물이 매트릭스이며 보통 ‘기질’(基質)이라고 옮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매트릭스는 미래의 언젠가 거대한 슈퍼컴퓨터가 모든 인간을 ‘배양’하는 장면에 나온다. 그때 인간의 생활은 그것이 실상이고, ‘진짜’라고 여기는 일상생활은 한낱 가상현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서양인, 특히 영미인들은 이 같은 내용을 순식간에 이해함에 비하여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영어가 그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대로 모래알처럼 흩어진 관념으로 배운다. 나중에야 배경을 꿰뚫는 일관성에 눈을 뜨고 틀을 갖추지만 그동안 겪은 고생과 손해는 결코 적지 않다. 이런 핸디캡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이 국력에 비하여, 중국이 인구에 비하여 노벨상 수상자가 적은 데는 여러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언어의 핸디캡은 분명 무시할 수 없다. 인도가 중국보다 인구도 적고 후진국이면서 노벨상 수상자는 더 많은 것도 공용어인 영어에서 힘입은 바 크다.

수많은 우리 학생들이 푸른 꿈을 안고 유학을 떠난다. 근래 차츰 다양해지고 있지만 큰 줄기는 역시 미국쪽이다. 전체 숫자로는 인도와 중국의 유학생이 우리보다 많다. 그러나 인구 비례로는 우리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불리해지리라고 한다. 2004년부터 ‘차세대 토플 시험’이 나와 ‘실제 구사능력’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문법의 비중을 크게 낮추고 독해·작문이 강화됨은 물론 말하기 시험이 처음 더해진다. 따라서 그 전에 높은 점수를 얻든지 아니면 문법 중심에서 벗어나 생활 영어에 전념하라는 충고가 들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법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아무리 언어 시험과 교육이 바뀐다 해도 단어와 문법 공부는 흔들리지 않는 근본이다. 그동안 문법 때문에 우리의 영어 교육이 겉돌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지적은 어디까지나 헛되고 부질없는 가짜 문법을 말할 뿐이다. 진짜 문법은 사고의 틀이자 모태로서 일상 언어에 면면히 스며 있다. 말하기를 중요시한다고 해서 말 아닌 말을 읊조려서는 안 된다. 차세대 토플 시험을 계기로 진짜 문법을 절실하게 익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