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과학 라이프&트렌드 이번호목차 지난호보기 독자마당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21 구독신청 sitemap

e-Book
표지이야기 특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과학 인터뷰 스포츠/건강 사진/만평 칼럼 독자마당
Home > 문화&과학 > 문화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1월19일 제644호
통합검색  검색
[출판] ‘빨갱이 에릭’의 20세기

꼿꼿한 좌파 역사학자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나만큼 오랜 산 사람은 20세기를 겪으면서 역사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0년 동안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느낌은 똑같은 기간으로 따졌을 때,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하게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그 기분이 어떤가 하는 것은 오직 우리만이 말해줄 수 있다.”


1917년 태어났으니, 그는 올해로 만 90살을 맞는다. 그럼에도 에릭 홉스봄에겐 여전히 ‘빨갱이’(Eric the Red)란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지난 2003년 그의 자서전이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칼럼니스트이자 ‘뉴스쿨’ 교수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뉴욕타임스>에 쓴 서평의 제목도 ‘빨갱이 에릭’이었다. 1931년 독일에서 사회주의 소년단에 가입했고, 1936년 영국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권의 몰락으로 영국 공산당이 해체된 1991년까지 당적을 유지한 열혈 좌파다.

‘혁명’과 ‘자본’의 시대를 넘어 ‘제국’과 ‘극단’의 시대로 이어지는 홉스봄의 노작을 접해본 독자라면, 그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이희재 옮김·민음사 펴냄)를 만나는 게 자못 설렐 듯싶다. 깔끔한 번역과 함께 이 걸출한 지식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947년 런던대학(버크벡 칼리지)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 미 스탠포드대·뉴스쿨을 오가며 사회경제사를 강의해 온 그의 교수 이력만도 60년을 헤아린다.

“호리호리하고 젓가락 같고, 구부정하고 못생기고, 머리는 금발인 열여덟 살 반 먹은 녀석. 이해력이 빠르고 피상적이지만 일반 상식이 대단히 많고, 이론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서 남다른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도덕심은 전혀 없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음. 혁명가가 되고 싶어하지만 아직까지는 신통한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음. …태산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하지 신념은 없음. 허영과 자만에 빠져 있음. 겁이 많음. 자연을 정말로 사랑함.”

대학 입학을 앞둔 1936년 새해를 맞아 일기장에 홉스봄이 자신에 대해 쓴 글귀다. 그는 자기 인생을 “우주 쪽으로 슬며시 비껴서 있다”고 표현했다. 그의 삶 대부분이 실제로 ‘그런 식’이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이주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이 몰락의 길을 걷던 때였다. 처음엔 아버지가, 2년여 뒤엔 어머니가 각각 세상을 등졌고, 그는 14살 때부터 독일 베를린의 친척 집에서 나치즘의 태동을 지켜보며 자랐다.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귀족 지식인 사회의 거점’이던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한 그는 자신의 성장기를 “생활을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옮겨다녔다”고 기억했지만, 어찌 보면 20세기 초반의 유럽은 미래의 역사가에겐 더없이 좋은 토양이었을 게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홉스봄은 철저히 ‘유대인 아닌 유대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조상들이 믿었던 종교의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심정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며 “한민족이란 이유만으로 내게 연대를 요구하는 작지만 호전적이고 문화적으로 낙후했으며 정치적으로 공격 일변도로 나아가는 민족국가에는 더더욱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중유럽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잉글랜드 사람이었고, 영국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였으며, 어디를 가도 유대인이었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곳에서 유대인이 받았을 법한 왕따를 당했다”며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고 돌이켰다.

구순의 나이에도 홉스봄은 여전히 꼿꼿하다. 그는 “20세기를 이해할 마음이 없거들랑 스스로를 변호하는 자기 변호론자의 자서전을 읽든가, 아니면 정반대로 잘못을 뉘우치는 죄인의 자서전을 읽기 바란다”며 “내가 얻으려는 것은 역사적 이해이지, 동의나 승인·연민이 아니다”라고 썼다.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를 온몸으로 살아온 대가의 삶을 쫓아가다 보면, 이 책의 원제가 왜 <흥미로운 시대>(Interesting Times)인지를 느끼게 된다. 음미할 수 없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던가? 그는 자서전을 이렇게 맺었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