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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사회 > 사람과 사회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7월19일 제6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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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전사 허황옥, 모르면 억울하대이

인도 출신 가야 여왕을 기리는 성인지 투어… ‘실버문화축제’는 남성 시의원들의 딴죽걸기로 축소 위기

▣ 김해=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거북어이 거북어이/ 나판때기를 내어놓으래이/ 퍼뜩 안 나오고 뭐하노/ 안 내놓으면 고마 니를 잡아 꾸버 묵어삘끼다.”

7월5일 경남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에서 구지가의 사투리 버전이 구수하게 들려왔다. 다음날까지 이틀 동안 ‘가야여왕 허황옥을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열린 성인지 투어의 두 번째 코스다.


△ 7월5일 저녁 김해 클레이아크에서 열린 파티에서 참가 여성들은 ‘허황옥’을 기리는 붉은 옷을 입고 소통을 상징하는 접촉 댄스를 추며 한판 푸지게 놀았다.(사진/ 김해 여성복지회관 제공)

이주여성, 호주제 폐지 선구자…

입담 좋은 아구할매(연기자는 김해여성복지회관 나갑순 부관장)가 구지가를 여성의 관점에서 들여다본 ‘구지봉 이바구(이야기)’를 시작했다. “거북이 나판때기가 뭔지 알재? 그 뭐시기 안 있나. 발기라카나, 귀두라카나.”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옛날옛적에는 여자들이 한가락 했던 시대가 있었능기라. 막말로 여자들 힘이 굉장했능기라. 여자 제사장들이 구리 맹검을 들고 호리뺑뺑이(늦가을 동제를 지낼 때 긴 상모꼬리를 돌리는 것)를 돌리며 남애들 겁도 마이 줬다카데이.” AD 42년, 여자들이 남정네를 갖고 노는 수단으로 구지가를 지어 불렀다는 해석이다. 페미니스트 한의사 고은광순씨는 “내 나이 오십 먹도록 구지가에 이런 뜻이 있는지 몰랐다”며 “김해 여자들 이렇게 재밌는 얘기를 지들끼리만 알고…”라며 억울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03명의 여성들은 이틀 내내 “아~” 하는 깨달음의 탄성과 함께 키득키득 비밀스런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 ‘103인의 여인’들은 김해에 왜 모인 걸까. 지난 6월 말, 이들은 김해여성복지회관(이하 복지관)에서 “김해로 모이라”는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은 △가야에는 여전사들이 있었다 △고대 가야에서는 이미 여성이 자식에게 자기 성을 물려줬다 △김해 할머니들은 김수로왕 부인 허왕후를 허수로왕이라고 부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김수로왕은 페미니스트란다! 메일을 받은 이들은 ‘아니, 초·중·고 12년 동안 역사를 배우면서도 왜 이런 사실을 몰랐던 거지’ 궁금해하며 김해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 모든 건 ‘김해 여전사’들의 새로운 시도 덕분이다. ‘김해 여전사’란 이 투어를 기획한 복지관 식구 및 자원봉사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자기 삶의 터전인 김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 가야의 역사를 시조왕 김수로왕의 관점이 아니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었다. 허황옥은 자신의 성 ‘허씨’를 큰아들과 작은아들에게 물려줬다. 이로써 지금 허씨의 약 50%를 차지하는 김해 허씨의 시조는 허황옥의 성을 물려받은 둘째아들 허겸이라고 <허씨대동보> ‘가락국기’ 편은 설명한다. 허모영 김해문화원 과장은 “허황옥은 자기 성을 아들에게 물려준 최초의 여성으로서 호주제 폐지의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는 2008년 1월1일에야 겨우 호주제가 폐지되고 제한적으로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게 된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1900여 년 전 고대가야 시절은 가부장적 억압이 없던 자유의 땅이었다.

허황옥은 AD 48년 16살의 나이에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가야 별포나루(지금의 진해)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인도에서 온 이주여성인 셈이다. 김명혜 동의대 교수(신문방송학)는 “허황옥의 삶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아 멀리까지 결혼하러 온 오늘날 이주여성들의 삶의 태도와 맥이 닿아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한국 사회나 미디어가 이주여성을 단순히 피해자로만 그리는데 실제로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국제결혼을 통해 김해로 온 이주여성들을 만나보면 진취성과 의욕이 크다”라며 이들의 개척자적 성격에 주목했다. 이주여성으로서 가야 사회에 다문화적 요소를 심었던 허황옥을 주목하면, 한국 사회가 이주여성들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얘기다. 다문화적 요소를 지닌 허황옥이 역사책에서 축소된 채 제대로 의미가 부여되지 못한 것은 ‘단일민족’과 ‘남자’를 강조하는 역사의 기억·기술 방식 때문이다. ‘여자들의 역사’는 그 과정에서 축소되거나 삭제되거나 왜곡됐다.

김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대성동 고분박물관을 찬찬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1990년 9월, 발굴 작업이 진행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갑옷과 철제투구로 무장한 세 구의 인골이 한 무덤에서 발견됐다. 이 뼈들을 분석해본 결과 20~30대의 여성으로 밝혀졌다. 다리 근육은 보통 여성보다 발달해 있었지만 틀림없는 여성이었다. 김해 예안리 57호분에서도 22점의 철촉, 철창 등이 쏟아져나왔다. 이와 함께 출토된 인골은 여성의 것이었고, 무덤의 주인이 갖고 있던 칼은 이 여전사가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지휘관의 위치에 있었음을 짐작게 했다. 가야에는 여전사가 진짜 있었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발굴이 있었지만 2003년 개관한 대성동 고분박물관에는 남자 무사들만 재현돼 있다. 여자의 경우, 함께 출토된 갑옷과 무기들은 쏙 빠지고 엉뚱하게 치마, 저고리를 입은 모습으로 복원됐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여자 무사의 존재 자체를 아예 지워버린 게 아닌가”라고 박물관의 행태를 비판했다.

전투복 대신 치마저고리로 복원

시인이기도 한 하선영 김해시 의원은 ‘금관가야 여전사’라는 시를 통해 전투복 대신 한복을 입은 가야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했다. “너를 보호해줄 투구와 갑옷을 입어라 그리고 칼을 들어라 (중략) 이름 없이 죽어간 그녀의 흔적을 결코 지우지 마라.” 이렇게 여성의 역사가 삭제·축소·왜곡되고 있는 현장을 보면, ‘(가부장적 제도가 득세한 조선 중기 이전에도)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부엌을 지켰다’는 세간의 통념 또한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


△ 가야에는 여자 무사들이 있었지만, 김해 대성동 고분박물관은 남자 무사의 모습만 복원했다. 전투복 대신 한복을 입은 가야 여인의 모습은 ‘여자 무사’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주류 남성의 역사 인식을 드러낸다.

허황옥의 무덤인 ‘허왕후릉’에서 시작된 투어는 구지봉과 대성동 고분박물관을 지나 김해도자건축전시관 클레이아크에서의 파티로 마무리됐다. 붉은 깃발을 배에 달고 가야에 도착한 허황옥의 개척정신을 되새기고자 참가자 모두 붉은색 의상이나 장신구를 착용했다. 말하자면 ‘뻘건 옷으로 드레스코드를 맞추고’ ‘허황옥의 기운을 받아’ 수다 떨고 춤추고 먹고 마시면서 한판 푸지게 노는 자리다.

김해 여자들이 이렇게 속시원하게 놀이마당을 펼친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복지관은 지난 2003년부터 9월에 허황옥의 정신을 계승해 할머니를 재발견하는 ‘허황옥 실버문화축제’를 열어왔다. 4회째였던 지난해에는 가야 여사제, 여족장 혹은 여왕으로서 가정, 사회에서 지녔던 할머니의 카리스마를 회복하자는 의미로 ‘카리스마 할머니’를 주제로 했다. 노래자랑, 패션쇼, 욕대회 등 할머니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짰다. 허황옥이 처음 가야 땅을 밟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었던 것에 착안해 ‘고쟁이 벗기 퍼포먼스’도 벌였다. 고쟁이로 상징되는 육체적 구속을 벗고 자연과 하나됨으로써 건강한 몸을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았다.

“매우 성공적인 축제”의 예산 삭감

여성 노인에 초점을 맞춰 이를 지역의 문화유산과 연계해 축제로 만들어낸 사례는 드문 일이다. 문화컨설팅업체 ‘기분좋은트렌드하우스 QX’는 지난해 김해시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허황옥 실버문화축제 평가’에서 “역사적인 인물(허황옥)에서 여성과 노인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도출해 축제로 연결했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인 사례”라고 밝혔다.

주최 쪽이나 참가자들이 규모를 확대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뤘지만, 이 축제를 지속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지역의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인식 때문이다. 김해시의회는 지난해 실버문화축제가 끝난 뒤 행정사무감사를 실시했다. 1억2천만원의 예산에서 3천만원이 추가 집행됐다는 게 이유였다. 장정임 복지관 관장은 “행사를 내실 있게 치르기 위해 마산MBC 등을 통해 3천만원의 지원금을 자체 조달했다”며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고, 문제 삼을 사항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의회에서는 올해 사업의 지원 예산을 통째로 덜어냈다. 용역 계약서가 이상하다, 집행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식의 절차상 문제가 이유였다.

하선영 김해시 의원은 “남자 의원 대부분이 실버문화축제에 대해 부정적이다”고 말했다. 하 의원은 “한 남자 의원은 ‘우리나라 여자도 아니고 인도에서 온 여자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축제를 왜 하느냐’라는 발언을 했는데 농담 같지 않았다”며 “김해시의 브랜드가 될 수도 있는 역사적 인물 허황옥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폄하하는 게 현재의 인식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올해 축제는 예년처럼 힘있게 진행되지 못할 우려가 높다. 사흘에서 하루로 줄어들고 시예산은 없이 자체 조달한 예산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류정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정책 팀장은 “국내 축제는 참여하는 이들은 여성이지만 집행은 남성들이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버문화축제는 집행·준비 전 과정에서 여성이 주체가 되고, 프로그램 내용도 여성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라며 “김해시가 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지역 자산을 등한시하는 것이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허황옥을 만나다’ 성인지 투어는 허황옥의 기운을 받아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며 실버문화축제를 이끌어온 김해 여전사들의 또 하나의 작품인 셈이다. 그들은 투어 참가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가야 건국 설화에 나오는 여섯 개의 알에서 왜 전부 남자 아이만 나왔을까? 만약 그 알 중에서 하나만이라도 여자 아이가 나왔으면 가야는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여자 지도자의 힘으로 신라 대신 가야가 ‘대통일’을 하지 않았을까?”

여섯 개 알에서 남자만 나왔을까

남성의 눈으로 남성의 역사만 보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반쪽짜리 눈이 아니라 온전한 눈으로 역사를 보자는 이들의 질문이, 삭제되고 비틀린 여자들의 역사, ‘허스토리’(herstory)를 복원해내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오늘과 내일의 허스토리는 좀더 신나고 재미있어질 것 같다.


김수로왕은 페미니스트!

버선발로 아내 맞고 귀띔받은 대로 관제 고쳐

영국에 헨리 8세가 있다면, 한국엔 김수로왕이 있다. ‘김해 여전사’들이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토대로 펼친 해석에 따르면, 김수로왕은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이자 권위를 앞세우지 않는 페미니스트였다.

알에서 태어난 훤칠하게 잘생긴 김수로왕. 신하들이 “어서 빨리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를 골라 배필로 삼으라”고 간언하는데도 “나에겐 하늘이 정해준 짝이 있다”며 튕겼다. ‘운명’을 믿는 로맨티스트라 할 수 있겠다. 신의 영험한 기운을 받고 있는 그는 운명의 여인이 바다 건너 올 것을 예감하고, 유천간과 신귀간 두 신하에게 그 여인을 기다리라 명했다. 영문도 모르고 바다에 간 유천간은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를 발견하고 급히 왕에게 전했다. 왕이 기뻐하며 배에 탄 그녀를 데려오라 하나 허황옥은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그대들을 모르는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소?”

이에 김수로왕은 직접 버선발로 궁궐 밖에 나와 왕후를 맞이할 임시 거처를 지었다. 그뿐인가.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절한다’고 허황옥이 데려온 시종들에게 좋은 음료와 술, 의복, 비단, 보화 등을 줬다.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도 각기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었다. 허황옥과 김수로왕은 합방 후 이틀 밤낮을 이 임시거처에서 알콩달콩 보낸 뒤 궁궐로 돌아갔다. 당시로 치면 파격적인 신혼여행이다.

왕후가 된 허황옥이 김수로왕에게 “(지위나 이름이 주먹구구로 돼 있는) 관제를 고치시지요”라고 귀띔하니 김수로왕은 “우두머리 이름이 귀족답지 않아 외국 사람들이 전해들으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신하들에게 명해 가야의 관제를 고치기도 했다. <삼국유사>는 허왕후와 김수로왕의 관계를 하늘과 땅, 해와 달, 양과 음이 함께 있는 것처럼 조화로웠다고 전하고 있다. 김수로왕의 왕후에 대한 사랑도 깊어 189년 허왕후가 157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김수로왕도 10년 뒤 세상을 뜰 때까지 “늘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슬피 탄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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