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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사람과 사회 등록 2002.05.08(수) 제408호

[사람과사람] 좋은 아빠, 그 고달픈 희망

가장의 역할 변화에 헤매이는 남성들… 머리와 몸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 건가

“아이, 정말 왜 이리 xx같이 막히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왜 그래요. 애들 듣는데. 아까부터 계속 짜증만 내고.” “뭐야, 정말….”

김수환(38·가명)씨는 끝내 두 손으로 자동차 핸들을 내리치고 말았다. 겁에 질린 아이들의 표정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싸늘해진 뒤였다. 화창한 일요일, 7살과 5살짜리 두 아들을 데리고 부인과 서울 근교 놀이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는 길이었다. 이날 아침 김씨는 “놀이공원 가자”며 몸 위로 올라타는 아이들 때문에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아이들과 한 약속을 생각해 간신히 몸을 추슬렀다. 부인이 밥상을 차릴 동안 그는 대충 방을 치웠다. 아침을 먹고 재빨리 설거지까지 했다. 그러나 길이 막히자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터져나왔고, 나들이길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김씨는 돌아오는 길 내내 ‘도대체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냐’는 서운함과 ‘식구들과 함께 놀아주기도 힘들다’는 생각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나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데…”

역설적이지만, 김씨는 “나도 정말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말로만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무척 노력하는 아빠다. 회사일을 하고도 집에 와선 설거지와 욕실청소 등 집안일을 돕는다. 첫아이부터 밥 주고 기저귀 가는 일도 마다지 않았다. 좋아하던 낚시도 한동안 끊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한쪽 가슴엔 늘 뭔가 응어리가 맺혀 있는 것 같았어요.” 집안에서 늘 어머니가 챙겨주는 것을 당연시했던 옛날 버릇이 몸에 남은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 동료나 친구들이 그만큼 하지 않고도 그냥저냥 지내는 걸 보면 좀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아빠’를 너무 머리로만 생각했던 게 큰 것 같아요.” ‘좋은 아빠가 옳고, 그렇게 돼야 한다’는 당위는 큰 반면, 그것을 위한 준비는 너무 모자랐다는 얘기다. “회사일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좋은 아빠는커녕 짜증이나 부리는 나쁜 아빠가 돼 있지 뭡니까.”

‘좋은 아빠’들이 부쩍 늘어났다. 부인과 함께 시장을 보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아빠들은 이제 평범한 가장상이다. 집안에선 손가락도 꼼짝하지 않았다던 전통적 아버지상은 이미 흐릿한 전설이 돼버렸다. 그러나 옛날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가는 새 세대 아빠들에게도 고민은 적지 않다. “언제 한번 어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인지 배워본 적이라도 있나요. 덜컥 아버지가 되고 그제서야 좋은 아버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뭐 쉽습니까.” 한국가족문화연구소 나원형 소장은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도 적지 않은 자기희생을 요구한다”며 “좋은 아버지에 대한 커져가는 사회적 기대와 개인적 관행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이 무척 많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좋은 아빠 스트레스’다.

“고생은 죽어라고 하고, 대접은 못 받고, 그렇다고 그걸 말로 내뱉을 수도 없고…. 요즘 아버지들이 참 힘들긴 힘듭니다.” ‘아버지의 전화’ 정송 대표는 “가족보다 회사를 선택했던 옛날 아버지 세대와 달리 요즘 아버지들은 회사 못지않게 좋은 가장이 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며 “그러나 이는 자칫 ‘회사일도 잘하고, 좋은 아버지 노릇도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나타나기 쉽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그런 어려움을 가족과 함께 대화로 푸는 훈련도 전혀 돼 있지 않아 혼자만 끙끙 앓게 되고, 문제가 더욱 커지는 악순환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는 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정 대표는 지난 92년 세워진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창립멤버이자, 이 단체에서 주는 좋은 아버지상의 96년 수상자이다. 그런 그도 “사실 좋은 아버지는 명예인 동시에 멍에이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집안일만이 아닙니다. 친구들을 만나도 술 한번 거나하게 마시고 취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친구들부터 ‘좋은 아버지가 일찍 들어가야지’ 하는 판이니까요.”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초보 아빠들에게 그런 주위 반응은 무시하기 힘든 부담”이라고 말했다.

‘좋은 아빠 스트레스’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프랑스 등 서구사회에선 이미 겪어본 문제이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는 1999년 9월6일치에서 미국 직장인들 사이에 ‘아빠 스트레스’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포브스>는 “직장 남성들이 직장 성공 못지않게 좋은 아버지 되기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특히 가사일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늘었다”며 “이런 스트레스는 우울증, 죄의식, 업무능력 저하는 물론 이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나원형 소장은 “우리는 가치관이 서구에 비해 훨씬 급진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좋은 아빠 스트레스는 슈퍼맨 콤플렉스와 연결된다. 정신과 전문의 김창기 박사(김창기정신과 원장)는 “직장 여성들이 직장일과 집안일 모두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시달리듯이, 요즘엔 아빠들도 직장과 가족 모두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눈앞에 보이는 직장의 성공과 성취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술자리 등 남성문화를 과감히 거부하기도 어렵다. 좋은 아빠가 못 된다는 자책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는 “아직 이 문제로 병원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만, 강연을 나가보면 아빠들의 관심이 매우 높은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좋은 아빠 스트레스를 아빠들만의 문제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정채기 한국남성학연구소장은 “변하려고, 좋은 아빠가 되려고 고민하는 아버지들이 기댈 곳이 없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기득권을 누려온 남성들이 변화 과정에서 겪는 과도기적 문제이지만, 엄마와 아이들의 이기심 또한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부인들이 경제적 성취의 열매는 예전과 똑같이 누리면서 집안에서의 아버지의 역할 또한 한꺼번에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아버지가 변화를 시도할 때 좀 미진하더라도 도와줘야 한다. 한 아버지가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읽겠다며 시집을 사왔는데, 부인이 ‘배가 불렀구나, 돈도 못 벌면서 무슨’ 해서야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최근 들어 급격히 거세진 부자 아빠에 대한 사회적 열망은 아빠 스트레스를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정송 대표는 “부자 아빠가 좋은 아빠라는 인식은 슈퍼맨 콤플렉스를 더 팽창하게 한다”며 “아버지들부터 돈이 많아야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울 수 있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채기 소장은 “엄마들도 남들과 비교하며 돈 많이 벌어오라고 하는 압력을 낮춰야 한다”며 “아빠에게 완벽한 후견인이 되기를 요구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슈퍼아빠는 광고에나 나오는 극소수의 행운아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중간치기들은 욕망의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에 중압감 시달려

변화의 과정에서 스트레스는 불가피하다. 나원형 소장은 “옛날 아버지들은 집안에서 가부장적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정작 본인은 스트레스가 없었다”며 “요즘 아버지들은 그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심리적 부담이 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스트레스에 함몰돼 스스로가 불행해지는 것이다. 나 소장은 “좋은 아버지는 가족에게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좋은 존재이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정송 대표는 “좋은 아버지가 가족들 하자는 대로 다해주는 아버지, 아첨하는 아버지로 치부되면 큰 일”이라고 경계했다. 정채기 소장은 “‘좋은 아빠’라는 표현이 그동안 아버지들이 외면했던 가족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지만, 정작 아버지 자신의 행복지수를 도외시한 측면도 있다”며 “‘내 식구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해준다’는 것도 일종의 가족이기주의인만큼,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나 소장은 “때론 아빠 혼자서 가족과 떨어져 여행을 떠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며 “스스로 성찰의 시간을 갖되, 다만 그 어려움을 가족과 대화로 나누라”고 권한다.

정채기 소장은 아버지의 변화는 ‘동화’가 아닌 ‘조절’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화는 바깥의 힘에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다. 조절은 나의 참여와 의지로 바꾸는 것이다.” 정송 소장은 “함께 고민을 나누고 힘을 북돋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나 모임활동에 참여해 스트레스를 발전적으로 푸는 것도 좋은 대안”이라고 조언한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가치다.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스스로가 주체가 돼 성찰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얘기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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