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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사회 ] 2002년01월09일 제392호 

파업 386일, 그 기나긴 겨울

거리로 내몰린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


사진/ "끝내 승리하리라!" 지난 1월3일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원들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시무식을 하고 있다.(박승화 기자)


무덤 앞의 시무식. 뜨거운 노래가 겨울산을 울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2002년 1월3일 오후 3시,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전태일 열사 묘역 앞. 한국통신(현 KT)계약직 노동조합원들이 2002년 ‘시무식’을 시작하고 있었다. 붉은 머리띠의 대오 속에서 구호가 터져나왔다.

“열사의 뜻 이어받아 비정규직 철폐하자!”

해고철회와 정규직화를 위해서라면…

벌써 두 번째 겨울이다. 파업 386일째. 한통계약직 노조원들의 단련된 팔뚝질과 일사분란한 구호소리에는 지나온 한해가 녹아 있다. 경기도 분당 한국통신 본사 앞 천막농성, 목동전화국 점거, 한강철교 고공시위, 국회 본회의장 진입…. 해고철회와 정규직화를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단죄의 칼날이었다. 구속 5명, 불구속 61명, 구류 79명. 대오 속 100여명의 노동자들 중 유치장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업무방해,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부과된 벌금만도 8700만원. 400일 가까운 파업을 거치며, 한통계약직 노조는 ‘장기파업 비정규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000년 연말, 한국통신 7천명 계약직 노동자들에게는 해고통지서가 날아들었다. 70만원도 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오직 정규직화의 희망으로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2000년 12월13일 파업에 돌입했다. 한국통신은 필수공익사업장에 해당되지만, 중앙노동위원회는 이례적으로 직권중재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회사쪽이 중재기간 중 성실하게 교섭에 임하지 않아 귀책사유가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회사는 파업이 시작된 뒤에도 경총에 교섭권을 위임한 채 협상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겨울거리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혹한의 나날이었다. 수은주가 영하 20도를 향해 곤두박질치던 2001년 1월15일. 스물아홉의 청년, 이동구씨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버틴 지 한달 만이었다. 의식을 잃은 채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이씨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그러나 뇌손상으로 오른쪽 팔다리를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을 만큼 병세가 호전되는 데 1년이 걸렸다. 지금도 언어장애는 여전하다. 2001년 연말, 근로복지공단에 낸 산재신청마저 기각당했다.

이씨가 쓰러진 다음날인 1월16일에는 조합원 다섯명이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겨울바람 속에 묻히고 말았다. 한통계약직 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이춘하씨는 “해고도 서럽지만, 언론의 냉대는 삭풍보다 더 서러웠다”고 돌이킨다. 일단 분당 본사 앞 농성을 접고, 전국 순회투쟁에 나섰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니 어느새 봄이었다.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투쟁은 더욱 거세졌다. 2001년 3월29일 새벽 3시. 한국통신계약직 노조원 196명은 기습적으로 목동전화국을 점거했다. 파업 107일째였다. 점거도 잠시. 아침 8시30분, 특수부대까지 동원된 진압작전으로 전원이 연행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한통계약직 노조 홍준표 위원장은 2년6개월을 선고받고 강릉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늦봄에는 또다른 비보가 날아들었다. 5월16일, 조합원 한승훈(41)씨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사인은 장파열. 아침에 집에서 면도를 하다가 쓰러졌다. 장기농성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지 하루 만이었다. 한통계약직 노조 최봉근 대외협력국장은 “한겨울 농성이, 오랜 생활고가 죽음을 불렀다”고 되뇐다. 13년을 한국통신에 근무해온 한씨지만, 이동구씨처럼 보상받을 길이 막막하다.

다치고, 죽어가면서도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노동절 전날인 2001년 4월30일 오후 5시. 서울 용산구 데이콤 용산지부 앞에서 두명의 조합원이 8m 높이의 광케이블에 올라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10월31일에는 세명의 조합원이 국회 본회의장에 진입하기도 했다. 최 국장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억울한 사연을 알릴 길이 없었다”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투쟁방법이었다”고 돌이킨다.

다치고 죽어도 회사측은 묵묵부답


사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위. 한 조합원이 해고철회를 위해 '나홀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김종수 기자)


강경투쟁이 이어지자, 1년 가까이 침묵하던 회사쪽이 교섭을 요청했다. 노조는 조합원 총회를 통해 결의한 요구안을 들고 협상테이블에 나섰다. 11월16일 열린 교섭에서 노조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위한 종업원지주회사 설립 △양천, 목동전화국 점거 투쟁으로 제기된 3억2천만원 손해배상소송 철회 등 6가지 요구를 내걸었다. 애초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에서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교섭일정을 추후 통보하겠다”며 시간을 끌었다. 노조가 11월20일까지로 협상시한을 못 박았다. 결국 타결은 이뤄지지 않았고, 파업 사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부의 중재 노력도 전무했다. 오히려 각 지방노동위원회에 낸 ‘부당노동행위 및 해고 구제신청’은 줄줄이 기각됐다. 11월 초 한통계약직 노조는 중앙노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문서 하나를 발견했다. 한통계약직 노조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문서였다. 파업이 시작될 때 내린 중앙노동위의 직권중재 유보 결정과는 상반되는 내용. 한통계약직 노조는 중앙노동위에 항의했다. 중앙노동위쪽은 “조정심사관의 착오로 잘못 작성된 문서가 올려진 것”이라고 답변했다. 문서가 즉시 삭제됐다. 하지만 이 문서는 이미 노동부, 서울지방 노동청 등에 발송돼 참고자료로 쓰여왔다. 노조쪽은 “해고 구제신청이 기각되고, 노조가 낸 고소고발이 모두 무혐의 처리된 데는 이 문서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한국통신정규직 노조의 외면도 이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계약직 노조의 설립 전부터 냉대는 시작됐다. 정규직 노조가 계약직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을 거부한 것이다. 계약직 노조를 따로 설립한 뒤에도 홀대는 이어졌다. 2000년 12월 정규직 노조의 파업 집회에서 계약직 노조위원장의 연대사를 가로막았다. 파업 1년이 넘은 지금까지, 정규직 노조의 지원은 전무한 상태다. 한통계약직 노조 간부들은 “정규직 사원들이 계약직 노동자를 고용안정의 위협요소로 생각하는 현실에서 연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고 전한다.

파업이 길어질수록 조합원들의 이탈도 늘어갔다. 1200명으로 시작했던 조합원 숫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생활고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자리를 잃기 전에도 한달 70만∼80만원의 계약직 월급으로 근근이 생활해온 터였다. “아기 우윳값이 없어서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울먹이며 떠난 조합원도 적지 않았다. 현재 남은 조합원은 242명. 한통계약직 노조 구광회 고문은 “카드는 막히고, 마이너스 통장은 다 긁어 쓰고, 전세방에서 월세로 밀려난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전한다. 생활고는 심지어 가족해체로 이어지고 있다. 남은 조합원 중 이혼 ‘당한’ 사람만 다섯명이다. 대구에서 올라온 한 조합원은 “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생활고에 조합원 이탈, 그래도 싸움은 지속


사진/ 누가 이들을 일터에서 쫓아냈는가. 지난 1월4일 조합원들이 서울 혜화전화국 앞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있다.(박승화 기자)


“어느날 집으로 돌아가니 여섯살짜리 딸 혼자 있더군요. 집사람은 집을 나간 상태였구요. 일단 누나집에 맡기기는 했는데, 돌봐줄 친척도 없고…. 입양이라도 보내야 하는 건지….”

한통계약직 노조원들은 하루하루 서울시내 대학 강의실을 전전하며 1년여를 버텨왔다. 대부분의 조합원이 지방에서 올라온 까닭이다. 한통계약직 노조 구광회 고문은 “서울시내에 있는 대학은 다 졸업한 것 같다”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어쩌면 이번 겨울도 차디찬 대학 강의실에서 나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선례가 되어야 한다”며 “그동안의 싸움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시무식을 마치고 모란공원의 비탈길을 내려오는 이들을 전태일 열사의 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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