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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11월29일 제6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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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 문제 유출, 풀리지 않는 의혹

두 번의 시험지 유출 의혹으로 SAT 시험 시행자격 박탈당한 한영외고…ETS와 교육당국의 침묵으로 파묻힌 진실, 시험 관리의 허점은 노출돼

▣ 박주희 기자/ 한겨레 사회부 hope@hani.co.kr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지난 11월17일 서울 한영외고 게시판에는 평교사 22명의 서명이 담긴 장문의 글이 올랐다. 전체적으로 유학반의 파행 운영을 바로잡으라는 요구였지만,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었다. 한영외고에서 미국대학입학자격시험인 SAT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한영외고의 시험 시행(테스트 센터) 자격이 박탈됐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외국인학교와 외국어고 등 9곳에서 SAT가 시행된다. 가장 공정해야 하고 투명해야 할 대학입학시험. 한영외고에선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학교에서 사전에 복사된 문제를 풀었다?

<한겨레21> 취재 결과, 테스트 센터 자격을 취소하기 전인 지난 5월 미국교육평가원(ETS) 조사단이 학교를 방문해 보안과 시험부정 의혹에 대해 조사를 벌였고, 6월16일 SAT 시험 시행 자격을 박탈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조사는 “한국에서 SAT 시험지 유출이 있었다”는 제보와 함께 제보자가 ‘유출된 기출문제를 가공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연습문제 복사본이 ETS에 접수되면서 시작됐다.


△ 지난해 한영외고에서 SAT 보안·부정 의혹이 제기됐다. 한영외고 평교사 22명은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서울 대형서점에 비치된 SAT 수험서들.(사진 /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취재진이 확인한 SAT 보안·부정 의혹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난해 6월 한영외고 유학반 2·3학년 일부 학생들이 SATⅡ 화학시험을 앞두고 학교에서 사전에 복사된 시험문제를 풀어봤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시험 10회분에 해당하는 80장의 SATⅡ 수학 기출문제가 ‘모델 테스트’로 가공돼 이 학교 학생들이 시험대비용으로 풀어봤다는 주장이다. 1년에 7차례 치러지는 SAT는 문제은행 방식으로 출제되기 때문에 시험주관 기관인 컬리지보드는 공식적으로 공개한 기출문제 외의 문제가 유출되는 것을 엄격하게 막고 있다. 예전에 나온 문제가 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유출 의혹’이 생기는 것일까. 이는 SAT가 미국 대학을 지망하려는 소수의 학생들이 치르고, 또한 테스트 센터가 소수의 유학반 지도 교사에 의해 주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SAT 학원의 한 관계자는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 유출되는지 해외에서 구해오는지 구체적인 경로는 알 수 없지만, 학원가에서는 SAT 기출문제가 공공연히 나돈다”고 말했다. 한 학부모가 취재진에게 말을 열었다. 당시 이 학교에서 화학시험을 친 졸업생의 학부모였다. “그때 화학시험을 친 학생들 일부가 시험 며칠 전에 풀어본 문제가 그대로 시험에 나와 고득점을 받았어요. 교사가 학생들에게 ‘한번 풀어보라’며 줬다는 얘기도 있고, 한 학생이 가져와서 복사해서 풀어봤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ETS는 지난 5월 한영외고를 찾아가 교장과 유학반 담당자, SAT 화학 강사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아무개 유학반 디렉터(담당 강사)는 “한 학생이 시험지를 가져와서 친구들과 함께 복사해서 풀어봤는데 며칠 뒤 시험에서 같은 문제가 나온 것으로 안다”며 “학생들이 풀어본 시험지가 학원가에 나도는 기출문제인지, 해당 시험지를 그대로 복사해서 풀어본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SAT 기출문제를 해외에서 구해온다는 말도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시험지가 사전에 유출됐다고 단정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밝혔다. 문제의 화학 시험지를 학교로 가져온 것으로 지목받고 있는 학생의 부모에게 관련 사실을 물으니, 그는 “우리 아이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학원에서 시험지를 가져올 수 없다”고 부인했다. 해당 화학 강사는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시험 전후에 시험지 복사해야 가능

하지만 또 다른 학부모가 밝힌 정황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당시 화학시험을 치른 뒤 유학반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 ‘시험문제가 어려워서 사전에 안 풀어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시험문제를 사전에 풀어본 학생들은 만점인 800점을 받기도 하는 등 고득점을 받았다”고 전했다. 취재 결과를 종합해보면, 지난해 6월에 치른 문제의 화학시험을 일부 학생들이 미리 풀어봤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 시험지가 어떻게 이 학교 유학반으로 흘러들어왔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 상태다.


△ 한국에서 시행되는 많은 미국 시험에서 여러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지만, 교육당국은 팔짱만 끼고 있다. 미국 하버드 법대 캠퍼스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사진 /AP/ CHITOSES SUZUKI)

취재진은 ETS 쪽에 조사 결과에 대해 알려줄 것을 국제전화와 이메일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ETS는 “답할 수 없다”고 밝혀왔다.

SAT 시험지는 시험을 치르기 며칠 전 ETS로부터 각 테스트 센터로 배달된다. SAT 담당자(코디네이터)는 이를 수령한 뒤, 시험지를 보안이 보장되는 장소에 보관했다가 시험 당일 고사장인 교실에서 개봉한다. 시험이 끝나면 시험지는 답안지와 함께 모두 회수돼 ETS로 보내야 한다. 따라서 컬리지보드가 공개하는 일부 기출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기출문제가 나도는 것은 사전이나 사후에 시험지를 복사해둬야만 가능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시험지가 유출된 것일까.

취재진은 이 학교 수학 강사가 학생들에게 연습풀이용으로 나눠줬다는 수학 시험지 80장이 이미 공개된 기출문제를 가공한 것인지, 유출돼서는 안 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ETS는 제보자로부터 이 수학시험 문제 일부를 이메일로 받아본 뒤 제보자에게 나머지 문제를 전부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그 뒤 한영외고를 포함한 한국의 다른 SAT 시행 학교도 방문해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정작 한영외고 방문조사에서 연습풀이용 수학시험 문제에 대해서는 조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가 된 연습풀이용 시험지를 나눠준 교사는 “공개된 문제를 바탕으로 구성된 여러 출판사의 책에서 문제들을 뽑아서 연습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취재진은 ETS에 이메일을 보내, 이 수학 시험지가 보안상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ETS는 역시 답변을 하지 않았다.

ETS는 대신 취재진에게 “ETS는 2006년 6월 한영외고 SAT 테스트 센터 문을 닫았다”며 원칙적인 입장만 밝혔다. ETS 담당자인 레이 니코시아가 6월16일 한영외고 코디네이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한영외고가 ETS 기준과 규칙을 위반해 테스트 센터로서 자격을 상실했다”고 짤막한 이유만 나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과 규칙을 위반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 학교 유학반 디렉터와 코디네이터는 “ETS로부터 공식적으로 센터 자격을 취소한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며 “조사 당시 시험지를 교장실에 보관한 것에 대해 보안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SAT 센터가 문을 닫은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해 ETS에 경위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주장했다.

교육부 “해명 요청 적절치 않다”

최근 외국어고에 앞다퉈 생긴 유학반 출신을 포함해 한 해 한국에서 미국으로 직접 유학가는 고교생은 수백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많은 시험이 한국에서 열리고 여러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지만, 교육 당국은 팔짱만 끼고 있다. 취재진은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인 정봉주 열린우리당 의원을 통해 교육부에 SAT 시험부정 의혹에 관해 ETS에 공식 답변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교육부 담당자는 “ETS는 사설기관이므로 교육부가 해명을 요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해왔다. 교육 당국의 방치와 당사자들의 엇갈린 진술 속에 공정하게 관리돼야 할 시험의 ‘진실’은 묻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