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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장일의 포토농장 등록 2002.11.25(월) 16:42

'신춘문예 시집' 다시 낸 정일근 시인

"무엇보다 시에 대한 초발심이 담겨 있는 만큼, 신춘문예 등단이나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읽어 주었으면 합니다. 죽은 시집이 아닌 읽어주어서 살아있는 시집이 되길 바랍니다."

지난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란 詩로 등단한 울산의 서정시인 정일근 씨. 그가 이 詩를 제목으로 1991년에 냈던 시집을 최근 다시 출간했다.(새로운 눈 刊)

'유배지에서 보내는...'은 당시 심사위원이던 김현 박재삼 홍윤숙 시인도 "수준 높은 시"라고 입을 모았고,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중 손꼽히는 '秀作'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시집(바다가 보이는 교실)은 서울(창작과비평사)에서 냈으니, 두 번째 시집은 지역에서 내야겠다고 생각했죠. 한창 지역문학운동에 열심이던 때인데, '문학의 중심은 지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시집은 서울의 이름난 출판사를 고집하는 건 어불성설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산에서 시집을 냈지만 당시의 '후진적 유통구조'가 정 시인의 깊은 뜻을 옭아맬 줄이야! 부산에서 출판되는 시집은 전국 서점으로 깔리지 않았고 결국, 절판되면서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은 '유폐된 시집'이 되고 말았다. 독자들은 정 시인이 그런 시집을 낸 사실을 몰랐고, 동료 시인들조차 '시집을 구할 수 없냐'는 요청에 시달리다 11년이란 세월의 강을 넘어서야 '재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의 재 출간은 정 시인의 표현대로 한다면 "내 시의 흐름에서 누락되어 있던 한 부분의 복원"의 의미다.

지나간 추억도 고쳐지기를 바라는 게 인간의 욕심인데 정 시인은 시집에 실린 11년이나 지난 시에 손을 대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읽어보니 흠이 많은 상처투성이 작품이 많더군요. 물론 고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요. 그러나 그 모습이 정직한 저의 모습이고 독자들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 옛 모습 그대로 출간했습니다." 시집엔 정 시인이 10대, 20대에 쓴 작품들이 주류다. 신춘문예를 준비하기 전과 당선하고 난 뒤의 '젊고 싱싱한 시편'들이다.

詩 '유배지에서 보내는...'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얽혀있다. 정 시인은 대학 4학년이던 84년, 11월 3일 '학생의 날' 시위를 주도하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됐다. 급하게 학교를 빠져나간 시인의 가방 속엔 문순태 작가의 '유배지'란 책이 있었다. 거제 학동 바닷가에서 몸을 숨기도 있던 정 시인에게 문학회 후배가 신춘문예 공고를 오려 가져다주었는데, 한국일보 공고가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시와 소설로 공모 장르를 줄였고 상금도 가장 높았기 때문.

'유배지'란 르뽀집을 읽고 읽으며 만들어 낸 작품이 바로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수배를 받고 있던 제 심정을 '유배지'에서 빌려 쓴 시였다"고 정 시인의 회고한다.

지금은 성탄절을 전후로 해서 당선자에게 당선소식을 알리지만, 당시 한국일보는 1월 1일자 신문을 통해 당선소식을 당선자와 독자에게 동시에 알렸다. 새해 첫날 정 시인은 신문사 지국으로 달려가 신문을 펼치고서야 자신이 '신춘문예 월계관'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았다.

정 시인은 지난 1992년부터 '울산시인학교'란 시창작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 동안 20명의 회원이 신춘문예나 문예지로 등단할 만큼 저력있는 '시인 등용문의 산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백화점이나 사회교육원식의 단기강좌가 아니라 '평생을 같이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정 시인과 회원들이 일궈 낸 성과다. 특별한 시작강의법이 있느냐는 질문에 정 시인은 "시 공부는 등단이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게 제 생각"이라며 "잠시라도 생각을 놓고 있으면 도망가 버리는 시를 항상 붙잡아 놓기 위해 같이 공부하니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운다"고 말한다.

정 시인이 11년 전 '유배지에서...'를 부산에서 낼 때 가졌던 '지역이 문단의 중심이 돼야 한다'란 신념은 지금도 단 한 치의 변함이 없다. 지난 3월 '지역문학인들의 권익을 찾자'는 취지로 출범한 '지역문학인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정 시인은 "서울 중심의 고질적 문단 풍토와 문학권력에 맞대응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역문학의 건강한 자생력을 갖추는데 주력하고 있다"며 지역문학인회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지역의 문학인이 좋은 작품집을 발간하면 '사서 읽기 운동'을 벌이고 지역문학행사에 지역문학인을 우선적으로 초대해 문학의 지역적 저변을 다진다는 것이다.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평가하는 정 시인은 "홈페이지도 준비하고 있는데, 등단이나 작품발표를 미끼로 잡지판매를 강요하거나 유사 문학상을 만들어 수상을 미끼로 시상식 금품을 요구하는 행위, 지역 문학인 스스로 품위를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인터넷을 통해 사실을 공개해 경종을 울릴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는 "서울이 지역문학에 많은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지역문학이 있어야 한국문학의 경계가 확장되는 것"이라며 "지역문학이 튼튼해야 한국문학이 튼튼해집니다. 지역문학은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영토이며 현장"이라고 강조한다.

정 시인이 20대 후반 교사 시절 쓴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란 시가 지난해부터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래서 2001년 지역문화의 해 기념 '지역문화 전국 10대 우수 사이트'로 선정되기도 한 그의 홈페이지www.ulsan21.com에는 중학생들의 방문도 잦은 편.

학교에서 내준 과제물을 위해 제법 정중하게 부탁 글을 올리는 학생들도 있지만, 치기 어린 글을 올리고 도망치는 개구쟁이도 많다. "중학교 1학년 학생에 제 시들을 보고 '별 것 없네'라는 글을 남기고 가기도 합니다. 저는 그 글이 고맙습니다. 정말 별 것이 없는 시를 쓰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는 정 시인. "어린 선자(禪師)들이 주장자를 들고 저를 후리치는 것 같아요." 어린 학생들과 마주할 때마다 정 시인은 '바다가 보이는 교실'에서 아이들 앞에 선 젊은 중학교 국어교사 시절로 돌아간다.

내년이면 등단 20년이 되는 정 시인이 낸 시집은 모두 여섯 권. 12월에는 홈페이지에 연재하는 <시인의 편지>를 직접 찍은 사진과 묶어 첫 산문집을 낼 예정이다. 사진과 함께 실리는 <시인의 편지>의 글들은 그의 시 못지 않게 서정성이 뛰어나, 한 꼭지마다 조회수가 무려 5천∼7천 회에 달할 만큼 '전국적인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또 내년엔 고래를 소재로 한 동화도 준비하고 있고 시집과 산문집도 펴낼 계획.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서 정 시인은 생면부지의 김광균 시인으로부터 당선을 축하하는 장문의 편지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유명해 지기도 바라지말고 감처럼 익어서 10월 그믐이 오면 저절로 붉게 빛나는 시인이 되라"는 김 시인의 당부는 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 시인이 짊어지고 있는 '부채'다.

"첫 시집을 내고 보내드렸는데, 선생님께서는 마음이 착찹하셨나 봅니다. 간단하게 축하한다는 말씀뿐이었어요. 자꾸 회환처럼 남습니다"고 정 시인은 참회한다. 김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점 역시 '뼈아픈 후회'로 남는다.

정 시인은 김 시인에게 진 '문학 정신'의 빚을 갚아 나가며 '참된 시인'으로 살아갈 각오다. "김광균 선생님은 제 문학 정신의 스승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부끄러운 후학이 되지 않기 위해 시 한 편 한편에 늘 최선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정일근 시인 약력

1984년 실천문학 신인시 발표로 작품활동 시작,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0년 한국시조작품상 수상, 2001년 시와 시학상 젊은 시인상 수상, 2002년 소월시문학상 추천우수작.

시집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처용의 도시>, <경주남산>,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등이 있다. 또한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2000년 <히말라야에서 나팔꽃이 피는 까닭은?>로 한국방송대상 라디오 작품상을, 2002년 <귀신고래를 기다리며>로 MBC계열사 경연대회 은상을 수상했다. 울산대 국문학부에서 현대시창작과 시창작특강도 맡고 있다.

하니리포터 황봄 기자/ bohemian3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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