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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2.07(화) 05:00

(26) 처용이 서역인인 이유는


△ 조선 초 대악活?<악학궤범>에 있는 처용상

9세기 울산항엔 곳곳 아랍상인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둘은 내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하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가’다. 주인공 처용은 역신이 미모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도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물러간다. 그런가 하면 무성한 눈썹에 푹 패인 쌍거풀 눈, 우뚝 솟은 코, 밀쳐낸 듯한 주먹턱, 검붉은 얼굴색… ‘처용탈’ 속의 처용의 모습이다. 전승으로 굳어진 향가이고 탈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이색적이다. 그래서 처용에 관한 논란은 그치질 않고 있다.

중세 아랍문헌에도 기록


△ 처용탈(문화재청 홈페이지)



처용설화와 그에 곁들인 처용가, 처용무에 관한 연구논문만도 지난 80여 년 동안 근 300편에 달하니, 한국 국문학 연구에서 단일 대상으로는 단연 많다. 다양한 연구방법으로 거의 입체적으로 조명하다 보니, 같은 인물을 놓고 화랑이니, 호족의 자제니, 무당이니, 호국호법의 용이니 하는가 하면, 외래의 무슬림 상인이라고까지 하여 결국 ‘각인각설의 난무장’에서 처용은 ‘천의 얼굴’을 가진 인물로 비쳐지고 있다. 처용이란 무슨 뜻인가부터가 오리무중이다. 용이나 용의 얼굴, 샤먼의 이름, 무속신앙의 사제, 츙(치융) 같은 우리말의 한자음, 보통사람의 이름, 이땅에 사는 것이 허용된 외래인이라는 등 10여 가지의 구구한 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예 불가지론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는 처용설화의 모체는 고려시대 후반에 씌어진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신라의 49대 임금인 헌강왕은 어느 날 개운포(開雲浦:오늘날 울산)에 놀러나갔다가 그만 구름과 안개로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은 동해의 용이 부린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해 풀어야 한다는 일관의 말을 듣고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하니 구름과 안개가 걷혀 이곳을 개운포라 이름하였다. 동해용이 기뻐서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고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 아들 가운데 한 명은 왕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를 돕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은 그를 서울에 안주시키려고 미모의 아내를 맞게 하고는 급간이란 관직까지 주었다. 그러나 아내의 미모를 흠모하던 역신이 사람으로 변하여 아내와 몰래 동침한다. 처용이 그 현장을 보고 노래(즉 앞의 처용가)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오자, 역신이 처용의 이러한 너그러움에 감복되어 본래의 형체를 드러내어 무릎을 꿇고 사죄하면서 앞으로는 처용의 형상만 봐도 그 집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벽사신경(僻邪進慶:사악을 피하고 경시를 맞음)을 꾀했으며, 왕은 서울에 돌아와 약속대로 영취산에 절을 지었는데, 이름을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 하였다. 이와 같이 처용설화의 내용은 민담과 신화, 전설 등 여러 가지 주제를 설화적으로 가공하고 윤색한 복합설화다.

동해로 들어와 ‘용의 아들’

무릇 설화란 일정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나타나 사회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굴절시켜 반영하는 일종의 문학 장르다. 이것은 설화 자체가 그 문면을 포함하여 내용의 하나하나가 현실 그대로의 반영이나 상징은 아님을 의미한다. 설화 속에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부분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심한 굴절에 의해 현실을 가공해 허구적으로, 심지어 역적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설화의 이러한 양면성에다 특유의 이색성까지 겹치다보니, 처용설화가 그토록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복합설화이니만치 연구에서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는 것은 그럴 수도 있는, 바람직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주장을 잉태한 설화의 원초적 모태는 정사인 <삼국사기>에 명문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기록이야말로 설화로서의 변이과정은 물론, 주인공 처용의 실체를 밝혀내는 데서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49대 헌강왕 5년(879년) 3월에 왕이 동쪽 지방의 주와 군들을 두루 돌아다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 그들은 ‘형용가해 의건궤이(形容可駭 衣巾詭異)’, 즉 모양이 괴이하고 의관도 이상야릇해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산이나 바다에 사는 ‘산해정령(山海精靈)’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삼국유사>보다 약 140년 앞서 지어진 <삼국사기>에는 설화가 아니라, 자연인의 출현에 의한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개운포는 국제무역항


△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인 처용무의 5인 무희 복장 (삼성문화재단, <문화와 나>, 2002 가을호)

처용에 관한 <삼국사기>의 사실적 기록과 그로부터 약 140년이란 변이과정을 거쳐 나온 <삼국유사>의 처용 설화 내용을 비교해 보자. 헌강왕이 놀며 거닌 곳이 개운포를 포함한 동쪽 지방이고, 왕의 어전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을 춘 인물(자연이건 용자건)들이 신라인들이 그때까지 보지못한 생소한 대상들이며, 처용의 용모와 설화의 내용이 이색적이라는 데서는 두 문헌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기>에는 처용의 이름이, <…유사>에는 그의 출현연대가 없고, <…사기>에는 역신이나 처용가, 왕정 보좌 같은 내용이 없으며, 출현자 수에서 <…사기>는 4명이나 <…유사>는 7명으로 나오는 등의 다른 점들이 있다.

두 문헌 내용을 비교할 때 우리는 ‘사기’의 내용이 어떻게 설화로 가공·윤색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인 처용이 생면부지라서 ‘영물’로 오해된 것뿐이지, 사실은 자연인이며 외래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을 방증하는 사료들을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유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간대부로 있다가 울주에 귀양살이를 간 정포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처용이 개운포의 푸른 바다에서 나타났다는 현지 전문을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리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경상도지리지>에도 울산 남쪽으로 37리 떨어진 개운포에 처용암이 있는데, 신라 때 그곳에서 모양이 기괴한 처용옹이란 사람이 출현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직설적 처용가도 아랍영향

이러한 문헌 기록과 더불어 처용의 외인상을 말해 주는 증거의 다른 하나는 그가 지었다고 하는 처용가의 내용이 이색적이라는 점이다. 고전 연구가들에 따르면 신라 향가는 일반적으로 그 표현방법이 굴절되고, 내면적이며 형상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다시피 처용가는 이와는 달리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대담하며 직설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중세 페르시아나 아랍 문학에서 쉬 발견된다. 물론 이역간의 문학작품에서 어떤 공통적인 경향이나 요소가 포착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무턱대고 상관성의 소산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며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성은 어떤 매체나 교류, 특히 주역의 이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음도 부정할 수는 없다.


△ 울산 남구에 있는 처용암과 청용가비.



이상에서 우리는 처용이 결코 용 같은 영물이나 내국인이 아니라, 동해로부터 울산에 상륙한 처음 보는 외래인이라는 추단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온 외래인일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처용이 출현한 개운포가 어떤 곳이며, 그러한 곳에 나타날 수 있는 외래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문헌 기록과 유물에 따르면, 울산은 수도 경주를 배후에 둔(약 40km정도 떨어져 있다) 산업(철 생산 등)과 상업(경상도 66개 고을 중 유일하게 장사를 좋아하는 고을로 기록)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천연적인 양항과 내륙교통 요지로서의 조건도 두루 갖춘, 명실상부한 국제무역항이었다.

외래문물 다듬으면 우리것

그렇다면 이 국제무역항을 통해 선을 보인 외래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들은 아랍-무슬림들을 비롯한 서역인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남해를 통한 동서교역의 주역을 맡은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하고 정착까지 했다는 중세 아랍문헌의 기록과 신라 고지에서 서역인상의 무인석이나 토용 같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처용보다 200여 년 전에 토화라(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일본에 표착했다는 일본쪽 기록으로 봐서도 서역인들이 일찍부터 동방에 왔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 이러한 사실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이 처용의 자연인, 외래인 상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했던 주요인이었다.

지금 해마다 울산에서는 ‘처용문화제’를 열어 처용을 기리는 문화 한마당을 흥겹게 펼치고 있다. 자칫 그 원형적인 주인공이 외래인이라고 해서 탐탁찮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한낱 단견이고 기우이며 닫힘이다. 전승을 포함해 모든 문화현상은 어디서 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받아들여 제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건국신화들을 비롯해 우리네 많은 문화전통 중에는 그 뿌리에 외래적인 요소가 적잖게 묻어있다. 처용 실화가 오랫동안의 변이과정 끝에 전승으로 굳어져서 오늘로 이어진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만남이고 수용이며 열림이다.

정수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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