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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1년02월27일19시07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17세기 절제의 상징 쪼르륵 소리가 들린다


    사진/얀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하녀>, 45.5x40.6cm, 1655~60년, 암스테르담 제국박물관.

    <우유 따르는 하녀>는 종교화에 가까운 풍속화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덤덤한 일상의 삶을 들추어 따끔한 교훈을 구하기 좋아했다. 속담, 격언, 일화, 동화의 내용들도 한 꺼풀 벗겨내면 경건한 신앙고백이기 일쑤다. 부엌 바닥에 내놓은 발 데우는 기구는 `한결같은 마음', 또는 `변치 않는 정절'을 뜻하고, 밝은 빛이 비치는 유리창은 신성, 또는 하녀의 맑고 순결한 영혼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하녀는 그 당시 교훈 문학에서 자주 나오는 `주님에게 충복하는 하녀'가 된다. 또 하녀가 입은 옷과 두건 색깔 적청황백은 불, 물, 흙, 바람, 곧 인간의 몸과 영혼을 이루는 사 원소를 말하는 게 아닐까? 그림 왼쪽 유리창은 한 귀퉁이가 깨져서 그림 속 정적의 틈새로 빛이 흘러든다. 그림 속에 우유가 흐른다. 빛이 흐르고, 옷 주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고, 보는 이의 시선이 따라서 흐른다. 그림이 그려지고 350년이 지나도록 흐름은 쉴 줄 모른다. 화가는 문득 스치는 일상의 그릇 속에 바른 삶을 인도할 절제의 덕목을 쏟아 부었다.

    “이제 풍속 화가들로 넘어가자. 먼저 페이라이코스는 붓 솜씨가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화가였는데, 시원찮은 소재들을 그렸다. 괜히 별나 보이려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그림들을 가지고 누구 못지 않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발사나 구두장이의 일터, 나귀, 야채 따위만 골라가며 그리는 바람에 `허접쓰레기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되레 그 그림들 인기가 높아서 다른 화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제치고 훨씬 비싸게 팔렸다.”(플리니우스 <박물지> 35, XXXVII)

    중산층 1년 생활비 값에 경매

    1696년, 화가 베르메르가 죽고 스무 해쯤 지나서 유작 한 점이 경매에 출품됐다. 높이 두 뼘이 채 모자라는 소품이었는데, 낙찰가가 무려 175굴덴. 웬만한 중산층 일가족의 한 해 생활비로 쓰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가격이었다. 그림에 나오는 등장 인물은 여자 하나와 탁자 하나에다 허연 빈 벽하고 맨 바닥이 전부다. 눈을 비비고 봐도 뾰족할 게 없는 그냥 부엌 그림을 가지고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끌렸을까? 우유 따르는 여자는 옷차림과 머리 두건 모양새가 평범한 하녀다. 흙으로 돌려 구운 듯한 수더분한 몸매에 두 뺨이 발그레하니까 한 스물쯤 되었을까? 하녀는 투박한 옹기 단지를 들고 대접에다 우유를 따른다. 그림 왼쪽 창틀 소실선이 요구하는 시점은 하녀의 오른팔 위 부분 근처다. 단지를 기울이자 우유가 단지 주둥이 오목한 끝 부리에 모였다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하얀 우윳발이 실타래처럼 외로 꼬이면서 빈 대접을 채운다. 쪼르륵 소리가 들린다. 하녀의 오른손 모양하고 우윳발 굵기로 봐서는 따르는 걸 곧 멈출 모양이다. 그러나 그림 속에서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심지어 그림 속 얼어붙은 시간조차 가느다란 우유 줄기에 묻어서 저 혼자 속살대며 흐르는 것 같다.

    너무 기울지도 덜 기울지도

    이 그림을 고대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이 봤더라면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그 당시 항아리를 기울이는 건 예외 없이 강의 신들이었다. 수염이 근사한 강의 신들이 웃통을 벗은 채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큼직한 항아리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서 강물의 항구한 속성을 빗대곤 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웬 여자가 서서 두 손으로 우유 단지를 기울인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기독교 도상 전통에 따르면 그림 속의 하녀는 절제의 우의로 보는 게 맞다. `절제'를 뜻하는 템페란티아는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일곱 패덕에 능히 맞서는 네 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로 꼽은 적이 있었다. 지옥 구렁에서 솟아날 구원의 동아줄이라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은 맛난 음식과 향긋한 술을 탐내지 않고, 공명을 겸손으로 달래고, 헛된 배움의 욕구를 지혜로 대신하고, 공연한 권리 주장을 삼가고, 방탕에 실족치 않고, 정결한 삶을 지키는 일이 죄다 절제하는 힘에 있다고 보았다. 서양 미술에서 여성명사 `절제'는 대개 젊은 여자가 한 손에 목이 긴 호리병을 높이 들고 다른 손에 쥔 술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자세를 취한다. 너무 기울면 자칫 잔이 넘치고, 덜 기울면 술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니, 그때그때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절제의 까다로운 교훈은 지나친 낭비와 감질나는 인색, 둘 다를 경계한다. 300년 전 네덜란드 사람들은 포도주나 우유나 물을 조심스레 따르는 여자들을 지켜보면서 오래 전 태양의 열기와 파도의 위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행하던 이카로스의 운명과 비교하기 좋아했다. 태양과 겨루어 이기려는 자만을 누르지 못하고 더 높이 날아올랐던 옛 신화는 깃털을 이어 붙인 밀납이 녹아 내려서 그만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우의 템페란티아는 술이든 우유든 쏟거나 엎지르는 법이 없었다.

    베르메르는 부재를 통해서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재간이 남달랐던 화가다. 이 그림에는 뭐가 빠졌을까? 하녀가 혼자 등장하는 부엌은 살림이 퍽 간촐하다. 탁자에는 수수한 식탁보, 빵과 우유, 그리고 파란 법랑을 씌운 백랍 물주전자 밖에 `없다'. 여기서 빵과 물병은 성찬식의 기억을 일깨운다. 우유는 `갓난아이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구하라'는 성서의 비유대로 신성의 상징이다.(I 베드로 2:2) 그렇다면 우유를 쏟고 담는 질그릇들은 흙에서 난 인간의 육신을 빗대지 않았을까?

    탐욕도 사치도 바람기도 없다

    식탁도 가난하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부엌에 흔히 나옴직한 청어나 소시지, 버터나 치즈, 양파나 달걀, 굴이나 과자 따위가 하나도 `없다'. 만약 있었더라면 탐욕과 사치, 식탐과 육탐의 비유로 읽어야 했을 것이다. 뒷벽에는 못 두어 대가 박혀 있고, 긁힌 자국과 못을 쳤던 흔적이 남았다. 깨끗이 빨아 입은 낡은 옷처럼 친숙하고 정겹다. 벽에는 사냥에서 잡은 자고새도, 저녁 시간을 밝힐 양초도 걸려 있지 않다. 털 뽑은 거위도, 납작하게 말린 가오리도 안 보인다. 그런 게 있었더라면 모두 주책스런 욕망과 대책 없는 바람기를 뜻했을 것이다.

    우유 따르는 하녀도 마찬가지다. 표정과 옷차림에 꾸밈이 하나도 `없다'. 머리를 겸손히 숙이고 묵묵히 제 일에 열중한다. 절제의 슬기로운 덕목에 잘 어울리는 자세다. 젊은 여자들의 허영과 변덕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몹쓸 패덕의 패거리를 한 눈에 알아보는 방법을 일러준다.

    “눈썹을 찡그리면 `자만'이다. 눈웃음을 치고 손뼉을 치면 `아첨'이다. 졸고 있으면 `망각', 팔짱을 끼면 `나태', 장미 화관을 얹고 향유 냄새를 풍기면 `허영', 눈초리가 불안하면 `어리석음', 살이 통통하고 피부가 매끈하면 `육탐'이다.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9)

    노성두/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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