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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1년01월02일20시35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골리앗을 노려보는 폭풍전야 순간


    성당에 나뒹굴던 폐석을 조각

    피렌체 대성당 작업장에는 언제부턴가 큼지막한 대리석이 하나 버려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피에솔레의 조각가 시모네가 결을 잘못 건드려서 중간 토막이 엉뚱하게 깨지는 바람에 그 뒤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골칫거리 폐석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시의회에 요청해서 그 대리석의 사용허가를 받았다. 버린 돌이니 만큼 공짜나 다름없었다. 이걸 잘 다듬어서 시의회가 주문한 조각작품을 만들 작정이었다. 문제는 폐석을 살려내는 일. 인간의 실수로 자연의 고귀한 가치가 훼손되어 버림받은 대리석의 운명에다 새로운 삶을 불어넣는 과제였다.

    폐석을 살린다는 소문을 듣고 피렌체 사람들의 이목이 모였다. 미켈란젤로는 조수를 고용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번다한 구경꾼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작업실을 닫아걸었다.

    “주위의 벽과 비계 사이에 칸막이를 둘러치고 쉼 없이 작업에 달라붙었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다.”(바사리)

    작업이 끝났다. 칸막이를 걷어내자 폐석은 간 데 없고 늠름한 청년이 서 있었다. 다윗. 단신으로 골리앗을 죽이고 외적의 침략을 막아낸 이스라엘의 소년 영웅이다. 시민들은 공청회를 열어서 의견을 모은 끝에 다윗을 시청사 광장에다 세우기로 했다. 조각작품은 조각가 상갈로가 특수하게 제작한 수레에 실어서 날랐다. 수레가 광장을 통과할 때 시민들은 예술의 기적을 목격했다. 시청사 입구에 세워진 대리석 다윗은 단숨에 도시의 상징이 된다. 원래 대성당 받침 기둥 높은 곳에 올려두려고 했다가 광장으로 옮기게 된 건 성서의 사건에다 정치적 가치를 한 꺼풀 덧씌웠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어린 양치기 소년이 이처럼 근골이 떡 벌어진 청년으로 탈바꿈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때마침 밀라노 비스콘티의 군사 위협이 심각했던 터라 다윗은 피렌체 자치 공화국의 자유와 독립을 표상하는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소년이 아니라 어엿한 청년

    다윗의 부릅뜬 눈에서 불똥이 튄다. 세찬 콧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횟물을 발라서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양미간 주름이 조여들고 숱 많은 눈썹이 씰룩댄다. 다윗은 앞에 선 골리앗을 노려보는 참이다. 불레셋 장수가 이스라엘을 욕하자 산천이 떨었다. 그 순간 이름 없는 양치기 소년이 나섰다. 상대를 꼬나보는 다윗은 가슴이 일렁이고 목 근육이 실뱀처럼 꾸불댄다. 출렁이는 뱃가죽은 폭풍전야의 밤바다와 다름없다. 뒤로 숨긴 오른손에 팥알 만한 돌멩이 몇 알을 가만히 굴린다. 팔맷돌 한 알이면 적장은 마른 검불처럼 거꾸러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을 것이다.

    대리석 다윗의 꿈틀대는 이맛살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들은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무서운 눈빛이었다. 완성된 작품을 어디에 전시할지 의논하는 공청회에서는 시청사 안뜰 마당에 세우자는 의견도 나왔다. 좁은 공간에다 세워두면 다윗이 쏘아보는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고 주위를 맴돌 수 있다는 얌전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시청사 입구로 정해졌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시민 공화국의 문어귀에서 자유를 수호하는 액막이 부적의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조각 작품을 보고 무서워 떨다니? 맑은 영혼을 지녔던 옛 사람들은 정말 그랬다. 그들은 잠자는 조각을 흔들어 깨우거나 말없는 돌덩어리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익숙했다. 미켈란젤로가 모세를 조각했을 때도 `무섭고 두렵다'며 서늘한 예술의 눈빛에 벌벌 떨었다고 한다. 이런 평가는 차가운 대리석을 보듬고 생명의 더운 호흡을 쏟아 붓는 조각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찬사로 들렸다.

    피렌체공화국 자유독립 표상

    미켈란젤로는 여성과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누가 물을라치면, “내 피붙이는 바로 조각들일세”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생명을 나누듯 땀과 수고를 쏟아서 대리석을 깎았다. 제자 바사리는 스승의 삶을 정리한 전기에서 이렇게 썼다.

    “이만큼 짧은 시간에 볼품없는 돌덩이를 기적의 예술로 바꾸어놓았으니 그 솜씨는 하느님과도 맞설만하다.”

    정치판 따라 수난 여러 토막 나기도

    조각상을 시청사 광장에 옮기고 마지막 손질을 볼 때였다. 밑에서 구경하던 시장 소데리니가 다윗 코가 너무 크다고 트집을 잡았다. 조각상 바로 밑에 서서 고개를 뒤집고 올려보면서 하는 소리였다.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제대로 보일 텐데, 공연히 아는 척하고 싶어서 하는 잔소리가 분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터라 미켈란젤로는 할 수 없이 사다리를 올라갔다. 끌을 쥐고 톡톡 두드리는 시늉을 하면서 미리 호주머니에 한웅큼 넣어둔 돌가루를 슬쩍 꺼내서 아래로 살살 뿌렸다. 다윗의 코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이제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소데리니는 빙그레 웃으며 “기막히게 잘 되었소. 정말 살아 있는 사람같이 보이네요” 라며 흡족해했다고 한다.

    바사리가 전하는 일화는 르네상스 예술가의 작업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더 심한 간섭과 횡포도 당한 적이 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 조각 때도 그랬고, 피렌체 산 로렌초 교회 정면부 장식을 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문자 말 한마디에 작업이 취소되어서 카라라에서 어렵사리 떼어온 최상품 대리석을 대성당 바닥돌로 깔았어도 항변은 커녕 보상도 요구하지 못했다.

    다윗 조각의 운명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527년 공화파와 메디치가 갈등하면서 다윗 상이 애꿎게 봉변을 당했다. 왼팔이 분질러져 나가고 몸통도 여러 토막이 났다. 제자 바사리가 훼손된 대리석을 눈치껏 수습해두었다가 훗날 코시모 1세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복원했다. 현재 장소 아카데미아로 옮긴 건 1872년.미술사가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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