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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0년11월28일19시31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도대체 뭘 그린 걸까?


    뉘른베르크 화가 뒤러는 근사한 외모에 모피 옷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다. 사치만 부리는 게 아니라 그림도 곧잘 그렸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 그의 붓놀림을 본 벨리니가 화들짝 놀랐고,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황제에 버금가는 국빈 예우를 받았다. 그 당시 화가로는 드물게 부와 명예를 누린 셈이다. 당대의 예술가, 인문학자와 교류했고, 나중에는 황제가 초상화 좀 그려달라고 뉘른베르크까지 찾아와 모델을 설 정도였다. 뒤러가 올라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아누스가 사다리를 붙들고 시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미술사학계 '골치아픈 그림'

    뭣하나 부러울 것 없던 뒤러는 마흔 셋에 아주 골치 아픈 그림을 한 점 그린다. 훗날 `미술사학의 우울한 저주'로 일컬어질 손바닥만한 동판화였다.

    <멜렌콜리아>. 제목부터 우울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멜랑콜리의 우의일까? 그러나 중세 이후 알려진 멜랑콜리의 여러 유형 가운데 달콤한 우울, 나태한 우울, 꿈꾸는 우울 어느 것하고도 안 어울린다. 그냥 머리 총명한 학생이 눈빛을 반짝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그림 해석은 여러 갈래가 나왔다.

    'I'는 숫자일까? 준말일까?

    먼저 멜랑콜리를 아리스토텔레스 기질론과 연결해서 흑담즙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자 박쥐 날개에 새긴 멜렌콜리아 I에서 `I'이 숫자 1인지 라틴어 IRE의 줄임말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1이면 동판화 연작 첫 그림일 테고, 줄임말이면 `멜랑콜리, 꺼져라'다.

    멜렌콜리아는 멜랑콜리?

    뒤러의 동판화가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가 쓴 <비밀 철학>에 나오는 세 단계 멜랑콜리를 설명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울부짖는 박쥐가 표상하는 공포, 절망, 슬픔, 고독 따위 부정적인 우울로부터 날개 달린 우아한 알레고리의 여성이 신성의 비밀을 투시하는 상위 단계까지 차례로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그리파가 흘려 쓴 수기원고를 미리 돌려읽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정작 책으로 나온 건 동판화보다 19년이나 늦고, 그림 중앙 사다리 디딤목이 아그리파가 내세우는 천체 구성처럼 여섯 개가 아니라서 주장의 설득력이 바랬다.

    혹시 연금술 비밀이 감춰져?

    돌로 깎은 다면체 뒤쪽에 곤로와 집게가 연금술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박쥐 꽁무니에 뱀 꼬리가 달렸고, 밤에 뜨는 무지개에다 마방진의 숫자 배열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러가 연금술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는 기록이 없고, 비교할 만한 작품도 남기지 않아서 아직 가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벽에 걸린 천칭, 모래 시계, 마방진, 그리고 컴퍼스, 막대자 같은 도구를 두고 우주의 생성 비밀을 측량하려는 예술가의 야심으로 보기도 했다. 솔로몬의 지혜서 11장 끝줄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다”는 인용이 따라붙었다. 그럴 경우 뒤러는 갑자기 플라톤을 성서의 눈으로 읽는 피치노 류의 신플라톤주의자로 둔갑한다.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 예시?

    또 멜랑콜리의 알레고리 여성을 뒤러의 정신적 초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술가의 정령이 돌계단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길짐승과 날짐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박쥐가 빛을 등지고 무지와 맹목 속에 빠져드는 것을 필멸의 예술가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약점으로 보고, 제 몸을 부수며 밤하늘을 떠도는 혜성은 궤도 없이 헤매는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을 예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화상을 그토록 좋아하는 뒤러가 왜 여기엔 제 얼굴을 안 그렸을까?

    중구난방 해석이 그럴싸

    요컨대 문제는, 미리 결론을 정해두고 끼워 맞추는데도 신통하게 논리의 구슬이 술술 꿰어진다는 데 있었다. 사방 팔방 어디를 꿰어도 수의 합이 일치하는 마방진처럼. 결국 지난 백 년 동안 논의와 반론이 빗발치고 무수한 학문적 굴착과 시추가 거듭되는 동안 뒤러의 동판화는 끝없는 의문부호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학문적 노력들이 전혀 무상한 건 아니었다. 그 사이 미술사학의 학문적 방법론이 지레 성숙하고, 부수 성과들도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으니까. 미술사가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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