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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0년11월21일18시51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일일이 붙인 돌, 유리 3백만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

    1831년 10월24일 폼페이 발굴지에서 때아닌 탄성이 피어올랐다. 기원후 79년 베수비우스 화산재가 도시를 덮은 뒤 처음으로 자태를 드러낸 모자이크는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접어두고라도 그 규모가 엄청났다. 유리 조각과 납작한 돌을 300만개 이상 갈아붙인 대형 모자이크는 폭이 자그마치 5m가 넘었다. 이만한 작품이라면 숙련된 기술자 수십 명이 수년간 밤낮없이 달라붙어야 한다. 그림 주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마케도니아-페르시아 전쟁기록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게 있었다. 폼페이는 로마의 고급 관리들이 퇴직 뒤 한가한 노년을 즐기는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그런데 황제도 엄두를 내기 어려운 호사를 부리다니, 저택의 주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게다가 모자이크의 주인공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다레이오스 3세로 밝혀지면서 궁금증이 더해갔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그리스의 숙적 페르시아 제국을 몰락시킨 전쟁을 다루었다면 엄연한 공공 미술이다. 정치적 배경도 다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공 미술을 개인 저택의 바닥 장식으로 깔다니?

    마지막 문제는 간단히 풀렸다. 모자이크 군데군데 보수 흔적과 땜질 자국이 발견되자 고고학자들의 머리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땜질 자국은 기원후 62년 폼페이를 휩쓴 지진이 남긴 생채기로 판명되었다. 보수를 한 흔적은 다른 공공장소에 전시되었던 모자이크를 폼페이에 옮겨 깔면서 대강 날림으로 복원하다가 생긴 걸로 드러났다. 당시는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같은 실력자들이 로마에서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흉내낸다고 열 올리던 시대였다. 덕분에 이런 모자이크도 흩어서 재활용하지 않고 제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는 2세기 말 로마 기술자들이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기원전 4세기 말에 그린 그림을 보고 베꼈다. 원작 그림은 비슷한 크기로 알렉산드로스가 살았을 때나 죽은 직후에 완성되었던 것 같다. 대왕의 위업과 치적을 기리는 기념건축물을 장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그림을 그린 화가는? 대왕의 궁정화가 아펠레스가 먼저 물망에 올랐다. 이집트 여류화가 헬레나도 알렉산드로스의 전투 장면을 그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라서 에레트리아의 필록세노스가 가장 유력 후보로 점쳐졌다.

    나중에 개인 저택으로 옮겨깔아

    화가는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를 누르고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을 기록했다. 역사적인 사실을 증언하는 기록화를 그리면서 구성을 단순하게 짜고 색채를 절제했다. 줄거리의 진행이 두루마기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전경과 원경을 생략한 것도 극적 효과를 겨냥하는 무대 장치와 흡사하다. 모자이크 색채가 원작 그림을 충실히 반영했다면, 전체 그림에 사용된 색은 단 네 가지. 흑백적황이 전부다. 우아하고 세련된 그림보다는 전쟁 주제에 어울리는 간결 명료한 표현형식을 골랐다. 기억할 만한 역사를 공공 미술 주제로 삼은 건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전통이다. 색을 네 가지로 제한하는 회화 전통도 그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는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 화가가 그로부터 100년 전 그리스 고전기 양식을 구사해서 그린 기록화를, 기원전 2세기 로마 기술자들이 모자이크로 베껴서 공공 장소의 벽면에 전시했고, 이후 폼페이 개인 거실 바닥으로 옮겨 깔면서 대강 손을 본 다음, 기원후 62년 지진으로 갈라진 부분을 메웠다가, 17년 뒤 베수비우스 화산재에 묻혔던 셈이다. 알고 보니 폼페이의 모자이크 기술자가 만든 게 아니었다. 하기야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있다고 꼭 20세기 프랑스 화가가 그린 건 아니니까!

    도망치면서 부하들에겐 '돌격'

    기마 돌격대의 선봉은 알렉산드로스다. 투구는 벗어 던졌다. 명마 부케팔로스의 콧김이 거칠다. 죽음을 불사하는 젊은 대왕의 용맹을 본 마케도니아 군은 사기가 하늘을 찌른다. 페르시아 진영도 만만치 않다. “창검이 찬란한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무서운 공격은 막지 못했다. “최후까지 버티며 저항하던 페르시아 용사들이 하나둘 씩 눈앞에서 넘어졌다. 땅에 쓰러지면서도 적군과 말의 다리를 붙들며 왕을 보호하다가 죽어갔다…다레이오스는 만사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전차와 무기를 팽개치고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암말을 집어타고 도망쳤다.”(플루타르코스)

    “알렉산드로스는 쐐기 대형 기마대의 선두에서 함성을 지르며 다레이오스를 향해 기민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 순간 알렉산드로스가 손수 이끄는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페르시아 군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며 창 끝을 적군의 얼굴에 박았다…다레이오스는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아리아노스)

    알렉산드로스의 창 끝이 왕실 호위병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의 눈은 이미 다음 목표를 쏘아본다. 말과 함께 거꾸러진 호위병은 마지막 기운을 다해 창대를 붙든다. 왕이 도주할 시간을 벌려는 안간힘이다. 알렉산드로스와 눈빛이 마주친 다레이오스는 허벅지가 녹아 내린다. 때마침 호위병이 날랜 말을 코 앞에 대령했다. 그러나 옮겨 탈 틈이 없다. 전차 머리를 돌리는 마부의 성난 채찍이 바람을 가르자 네 필 말이 경황없이 허둥댄다. 제자리를 맴도는 전차 바퀴가 페르시아 병사를 짓뭉갠다. 놋쇠 방패에 비친 병사는 얼이 빠진 표정이다. 다레이오스는 달아나는 전차 위에서 오른팔을 휘두른다. 진격 명령이다. 페르시아 창기병들의 창대가 일제히 누웠다. 비겁한 왕은 혼자 꽁무니를 빼면서 애꿎은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내칠 심사인가 보다.미술사가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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