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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0년11월14일18시38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휘장 걷어내자 '이단이다' 경악


    1541년 만성절.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수십 년 째 완공이 지체되는 바람에 줄곧 여기서 의식을 치러왔으니 새삼스런 걸음은 아니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이윽고 창문을 가렸던 휘장을 걷어내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올려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후의 심판 날, 뭇 영혼들의 찬양과 울부짖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재림 예수가 하늘 복판에 앉았다.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성자와 성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퍼렇게 빛나는 하늘은 어떤 심판의 칼날보다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런데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은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성자, 성녀 알몸으로 그려

    그림 한 점을 두고 이단의 의혹을 천 가지 이상 꼽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를 달지 않은 것도 시빗거리였다. 예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첫 교황 베드로가 일군 천오백 년 역사의 가톨릭 교회가 그림 속 푸른 바다에서 뱃멀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 시비끝 수정결정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바오로 4세는 `그림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종장의 전언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께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그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 테니.” 그러나 뒤를 이은 피우스 4세에게는 그런 발뺌이 통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는 그림 수정을 결의한다. 1564년 1월 21일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은 미켈란젤로가 여든 아홉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내려졌다.

    수정 작업을 그의 제자 볼테라가 맡은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승의 뜻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가리개만 씌우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다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비난을 모았던 성녀 카테리나는 본격적으로 손보았다. 성자들의 부끄러운 곳을 덮는 가리개는 회벽을 파내고 젖은 석회를 새로 바른 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볼테라는 이후 `브라게토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가리개 귀신'이란 뜻이다. 미술사가 노성두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화상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돌로 쳐죽이거나, 자루에 넣고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은 극적 효과를 노리고 가장 참혹한 순교방식을 선호했다. 잔혹 주제가 판치던 17세기에는 심지어 성자를 십자가에 매단 상태에서 인피를 벗겨 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검으로 발라낸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자화상을 새겼다.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유령이 깃들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미켈란젤로는 제 얼굴을 그리면서 두 눈을 후벼팠다. 실명의 달콤한 유혹이 그의 붓을 이끌었다. 또 그의 표정은 젖은 걸레처럼 일그러졌다(그림2). 무슨 심사였을까? 성 바르톨로메오 말고도 살껍질을 벗겨서 죽은 인물이 또 있었다. 마르시아스.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으나 아폴론의 키타라를 능가하는 피리 솜씨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순교자로 추앙 받았던 신화 속의 존재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도 예술의 순교를 꿈꾸었을까?

    '목욕탕에 어울리겠습니다'

    시인 아레티노는 탁월한 미술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에게는 간지러운 아부를 서슴지 않았으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주특기인 독설을 쏟아냈다. <최후의 심판>을 보고 나서 1545년 일흔 먹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다.

    “천사와 성인들은 지극히 고귀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당신 그림을 보면 지상의 진지함이나 천상의 엄숙함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군요. 알만한 예술가라면 디아나에게 옷을 챙겨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베누스도 손으로 가릴 곳을 가리게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대가 예술을 구실 삼아 신앙을 깔보는군요. 순교자와 성스런 처녀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넋빠진 자세로 저마다 성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설령 유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쳐도 도저히 눈뜨고 못 볼 희한한 볼거리가 되겠군요. 이 그림은 교황의 성스러운 예배소보다 고급 목욕탕에 갖다두면 어울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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