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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0년11월07일18시46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있는 그대로' 버리고 '그렇게 보이게'


    뤼시포스의 <때 미는 남자>

    소크라테스가 하루는 조각가 클레이톤을 만났다. 궁금한 게 많았던 소크라테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달리기 선수, 레슬링 선수, 권투 선수, 오종 경기 선수들을 저마다 다르게 빚으면서 어떻게 입상 조각에다 살아 숨쉬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는지…” 묻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자세를 취하는데 따라서 몸이 솟거나 가라앉고, 웅크리거나 내뻗고, 긴장하거나 이완하는 모습을 올바르게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클레이톤은 인체 비례에서 가장 까다롭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고전기 조각가들은 수의 관계에서 비례가 나오고, 많은 비례에서 하나의 인체가 구축된다고 믿었다. 눈금자, 곡자, 집게자, 컴퍼스를 놀려서 자연의 완전한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때 미는 남자>. 뤼시포스의 작품이다. 우선 소재부터 튄다. 실물대를 상회하는 청동 입상이라면 당시로는 꽤 비쌌을 텐데, 하고많은 소재를 마다하고 하필 때 미는 남자를 골랐다. 다리를 벌리고 서서 균형을 잡고 팔을 앞으로 내민 대담한 자세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소재 선택이 조형 실험의 수단이 되었다. 조각가는 모래밭에서 실컷 운동을 하고 땀 범벅이 된 알몸들이 제 몸에 묻은 모래를 터는 자세를 눈여겨보았다. 수천 년 간다는 청동을 녹여서 잠시 스치는 짧은 순간을 포착했다. 두 팔과 다리는 고전기 조형 규범에 어긋난다. 수와 비례 대신 기능과 운동성이 인체를 구축한다. 또 <때미는 남자>는 두 다리의 자세와 길게 내뻗은 오른팔 덕분에 `회화적 평면성을 극복했다'는 찬사를 얻었다. 고전기 조각들은 하나같이 두 팔이 상체의 구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데, 흙 때를 턴답시고 불쑥 내민 팔이 조각의 공간적 정체성을 붙들었다는 것이다. 움직임의 순간 포착과 공간성의 정복. 이 둘을 묶어서 <때 미는 남자>는 최초의 헬레니즘 조각으로 불리게 되었다.

    뤼시포스는 조각작품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대신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존재보다 현상에 무게를 두었다. 진리보다 상식을 우위에 두었다. 고전기 조각가들처럼 자와 컴퍼스를 손에 들고 다니는 대신 보는 사람의 눈에다 집어넣고 재현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미지의 위력이 실존의 가치를 누를 것을 예견한 셈이다. 이로써 그리스 조각은 제 손으로 쌓아올리고 백년 동안 그 안에 자신을 유배시켰던 조형의 수학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선배 조각가들은 있는 그대로 만들었으나 뤼시포스는 그렇게 보이도록 빚었다.”(플리니우스) 미술사가 노성두

    '자연이 스승'이란 말에 조각가가 된 대장장이

    뤼시포스가 처음부터 조각가는 아니었다.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당대 최고의 화가 에우폼포스를 보았다. 그런데 누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에우폼포스, 당신은 스승이 대체 누구요?” 당돌한 질문에 행인들의 눈길이 모였다. 뤼시포스도 숨을 죽였다. 이윽고 에우폼포스가 팔을 들어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이 내 스승이라네. 다른 예술가의 예술을 모방해서는 안 될 법일세.” 이 말은 고대 미술사 최초의 자연주의 선언으로 간주된다. 뤼시포스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자연 말고는 스승이 따로 필요 없다는 말이 과외비 없이 독학으로 승부를 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당장 대장간을 뛰쳐나온 뤼시포스는 자연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며 혼자 힘으로 대가를 이룬다. 조각을 익히자 그의 손은 쉴 줄 몰랐다. 조각 한 점 팔릴 때마다 금화 한 닢씩 궤짝에 던져 넣는 습관이 있었는데, 죽고 나서 열어보니 1500개나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만든 작품도 1500점은 되었을 거라고 본다. 알렉산드로스도 뤼시포스의 솜씨에 반했다. 그래서 그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대왕의 공식 초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때미는 남자>를 돌려달라! 황제에 항의한 로마시민

    “아그리파가 <때 미는 남자>를 자신의 이름이 붙은 목욕장에 헌정해서 그 앞에 세워두었다. 이를 본 티베리우스 황제는 몹시 마음이 끌려서 갖고 싶은 유혹을 참기 어려웠다. 티베리우스는 통치 초기에 분별이 뛰어났던 군주였으나, 고심 끝에 조각품을 자신의 침소로 옮겨오게 하고 그 자리에다 딴 작품을 갖다 두게 했다. 이 일에 격분한 로마 시민들이 극장에 운집해서 `<때 미는 남자>를 돌려달라'고 거세게 외치기 시작했다. 황제는 어떻게든 갖고 싶었지만 마지못해 돌려주고 말았다.”

    플리니우스는 로마 시민과 황제 사이의 밀고 당기기 한 판 승부에서 결국 황제가 양보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기록에서 황제의 관용을 강조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공의 이해가 어디까지나 개인 이익에 우선한다는 `레스 푸블리카'의 원칙이 제정기에도 효력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 로마에는 전리품이나 약탈물, 특히 아테네, 올림피아, 델피 등지에서 끌어온 조각들이 분량도 엄청났지만 인기도 무척 높았다. 임시 가설 극장을 세우면서 조각품을 무려 3000점이나 전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목숨 바쳐 정복전쟁을 치렀던 로마 시민들은 공공 미술의 향유 주체가 당연히 자기네들이라고 생각했다. 티베리우스가 침실에 갖다두었다는 이야기에, “아무리 황제라지만, 자다 말고 때 밀 일 있나?” 의아했을 것이다.미술사가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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