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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0년10월31일19시32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황제도 놀랐을걸 "이게, 나요?"


    황제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진짜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 첫 황제의 용모를 이렇게 기록한다.

    “머리카락은 제멋대로였다. 시간이 아깝다고 이발사 여럿을 시켜 동시에 머리를 깎게 했기 때문이었다.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쓰는 시간에 수염을 다듬게 했고, 뭣하면 아예 말끔히 밀기도 했다…띄엄띄엄 난 치아는 올망졸망한데다 거의 썩었다. 머리카락은 살짝 곱슬에 금발이었고, 눈썹은 양쪽이 맞붙었다. 귀는 보통 크기, 코는 뿌리가 솟았고 코끝이 뭉툭했다. 피부는 흑갈색과 밝은 색 사이고, 체구도 작달만했다…몸은 가슴과 배를 가릴 것 없이 전신이 반점에다 얼룩 투성이였다고 한다…엉치뼈와 허벅지와 종아리는 왼쪽이 오른쪽보다 부실해서 걸음걸이가 절룩거리곤 했다.”

    기록선 작달막...조각은 훤칠

    황제 초상조각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무척 난감했다. 현재 남아 있는 아우구스투스는 대리석만 220여 점. 보석 조각, 부조, 그림에 등장하는 초상을 빼고 센 숫자다. 그런데 군복이나 시민 복식을 걸친 아우구스투스의 입상은 하나같이 훤칠하고 미끈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황제 열전>에는 분명히 땅딸막한 체구에다 일자 눈썹을 가진 놀부 인상이라는데, 흙에서 파낸 실물 조각들은 죄다 아폴론처럼 근사한 미남자니 고고학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건 당연했다. 역사가가 무슨 억하심정을 품고 황제의 생김새에 몹쓸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면, 초상 조각가가 실물과 영판 다르게 뜯어고쳤다는 이야기일텐데 과연 둘 가운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걸까?

    발견된 대리석만 220여점

    아우구스투스의 초상조각을 나란히 늘어놓고 고고학자들은 턱을 고였다. 외모의 특징을 따라 몇 가지 유형을 구분하는 데까지는 일사천리였다. 머리카락의 형태와 얼굴 윤곽과 피부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가 분류기준이었다. 그런데 어느 게 먼저고 나중인지 순서를 매기는 일에서 제동이 걸렸다. 유물 한 점의 정확한 연대 측정이 때로 역사를 뒤집는다는 건 고고학의 상식이다. 초상 조각의 제작 순서가 밝혀지지 않으면 관련 주장들이 모두 싸잡이로 가설이 되는 판이니 보통 일이 아니다.

    먼저 초상 조각으로부터 황제의 파란 많은 생애를 읽어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삶의 과정과 축적이 대리석 조각의 표정에 투영되었다는 추측이 바탕에 깔렸다. 피부가 탱탱하면 먼저고 주름살이 깊게 패이면 나중이라는 식의 생물학적 접근방식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초상 조각들이 전부 삼십대 중반쯤으로 나이가 비슷해 보이고, 거의 황제가 죽은 뒤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1820년대 초부터 왕성하게 달아올랐던 초상 조각연구는 150년 동안 헛물을 켠 셈이 되었다.

    1978년 독일의 고고학자 파울 찬커가 황제 초상 연구에 다시 불을 당겼다. 황제 한 사람의 초상 조각이 수천 점씩 여러 지역에서 한꺼번에 제작되었다면, 조각가들은 대리석 초상 대신 종이에 그렸거나 주화에 찍힌 황제 얼굴을 모본 삼아 작업했을 테고, 이 때 한번 복제한 얼굴을 자꾸 되풀이 복제하면서 조각가 개개인의 손맛이 새로 가미되거나, 지역마다 선호하는 조형에 따라 원형 초상의 생김새가 조금씩 변형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찬커는 불기를 쏘여서 읽어내는 레몬즙 글씨처럼 복제된 초상 조각들로부터 사라진 원형을 복원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시간이 갈수록 얼굴 팽팽해져

    그의 연구 결과를 보고 고고학계는 경악했다. 제일 팽팽한 얼굴이 끝으로 가고, 텁석부리 수염이 맨 앞에 왔다. 찬커의 주장은 명쾌했다. 사후에 신격화된 황제를 기념하는 추모 조각들은 보통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베끼지 않고 이상화된 모습을 선호하므로 당연히 제일 어려 보이고, 텁석부리 수염을 기른 아우구스투스의 초상은 양부 카이사르의 죽음과 복수를 기억하는 애도 기간에 나왔으니 제일 이르다는 것이었다. 주화 초상 연구에서도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초상 조각에서만큼은 나이를 거꾸로 먹은 셈이다.

    35살 '존엄한 자' 등극 목욕탕 극장에도 뿌려

    아우구스투스의 삶은 그의 달라진 외모만큼 파란만장했다. 본디 이름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들어갔다가 기원전 44년 양부가 살해되는 바람에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서 벼락부자가 되었고, 2년 후 카이사르가 신격화되자 덩달아 신의 아들로 행세했다. 약속했던 복수를 마치고,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물리쳤다. 클레오파트라가 전에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은 일이 있어서 그에게는 대권 경쟁의 라이벌로 비쳤을 것이다.

    원로원은 내전을 종식시킨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내린다. `존엄한 자'라는 뜻이다. 이때 나이 서른 다섯. 팍스 아우구스타의 새 시대를 열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초상 조각을 새기고 보급한다. 황제 숭배를 부추기는 일종의 통치 전략이었다. 행정관청과 법정을 비롯해서 모든 공공장소에 황제의 초상 조각을 전시했다. 극장과 목욕탕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속령과 식민지에 골고루 뿌렸으니 모두 더하면 수천 점이 족히 넘었을 것이다. 기원후 14년 죽을 때까지 조금씩 외모를 바꾸어가면서 초상 조각의 새로운 유형들을 퍼뜨렸고, 죽은 뒤에는 후대 황제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청동으로 굽고 대리석으로 깎았다. 율리우스 가문의 적통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전해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초상 조각은 대부분 사후에 만들어졌다.미술사가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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