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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0년10월03일18시49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풍류를 즐긴 로마황제의 별난 휴양지


    `티볼리의 조각 호수'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황제치고 좀 별난 인물이다. 젊어서부터 인두로 머리를 볶고 턱수염을 기르더니 황제가 되고 나서도 수염을 깎지 않았다. 게다가 짧고 간편한 로마 군대의 전투복장을 벗어 던지고 발목까지 주름이 길게 잡히는 그리스식 겉옷을 보란 듯이 걸치고 다녔다. 로마가 건국 이래 줄곧 싸움꾼들에 의해 왕위가 세습되었고, 권력 핵심이 언제나 군대의 지지로 지탱되어온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태였다. 칼 한 자루로 나라를 일으킨 로물루스가 보았더라면 당장 턱수염을 깎자고 덤벼들었을지 모르겠다.

    문화를 통치수단으로 삼아

    선대 트라야누스 황제는 철두철미 군인 황제여서 제국 영토를 한껏 드넓혔다. 그러나 통치권을 이어받은 하드리아누스는 무력을 접어두고 문화를 유력한 통치 수단으로 삼는다. 힘의 논리대신 영혼의 가치에 주목했다. 트라야누스가 로마의 광개토대왕이라면 하드리아누스는 세종대왕을 택한 셈이다. 게다가 여행을 좋아했고, 국경을 다투는 군사 원정보다 속주와 식민령을 돌아보며 미술 감상을 더 즐겼으니 로마 칠현 가운데 첫 문화 황제로 손색이 없다. 짬나는 대로 시인과 철학자들을 불러서 시간을 나누었고, 아예 연차 휴가를 내서 바다 건너 바깥바람을 쏘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스인 못지 않게 유창한 아티카 표준어를 구사했으니 통역관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수염 손질과 머리 다듬기에 열정을 쏟는 습관은 그가 아테네 총독으로 부임한 삼십대 중반께 시작되지 않았을까?

    티볼리 휴양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무거운 국사를 벗어나 잠시 머리를 식히던 곳이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30km 가량. 날랜 말을 집어타면 한 달음에 내닫는 거리다. 황제는 제국의 번영과 예술의 영광을 모두 쓸어 담아 구슬처럼 아름다운 휴양지를 지었다. 여행지에서 눈여겨보았던 아프로디테 조각과 원형 사원을 비롯해서 고전기 그리스부터 후기 헬레니즘까지 보석 같은 조각들을 그곳에 전시했다. 원형을 감쪽같이 떠내는 일은 솜씨 좋은 장인들 몫이었다. 나랏일을 팽개치고 달려오는 은신처이지만 문화 황제답게 도서관, 극장, 경주장, 욕장까지 골고루 갖추었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30km

    티볼리 유적 가운데 카노푸스는 용도가 좀 모호하다. 조각 호수에다 나일강 하구도시의 이름을 붙인 건 이집트 여행기념일까? 언덕배기 둘이 마주보는 복판에 100m 가량 오목한 물길을 파서 나일강을 빗대고, 호수 가장자리에는 조형물을 둘러쳤다. 르네상스 이후 수없이 도굴되는 바람에 본디 모습은 찾을 길 없지만, 밝은 무지개 문과 서늘한 대리석 조각들이 호수의 수면 위에 어른대는 광경은 그리스를 사랑했던 황제의 아름다운 정취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가랑잎을 밟으며 호숫가를 소요하는 하드리아누스는 꽃피는 스무 살 나이로 나일강에 빠져 죽은 안티노우스를 기억하면서 가슴저린 회한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 제국의 세력이 가장 융성했던 역사의 정점에서 거대 도시를 뒤로하고 인적 없는 전원에 숨어든 황제는 수경에 비낀 푸른 대리석 그림자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노예로 팔린 여자들에 저주를 내리다 '영원히 지붕을 이어라'

    호숫가 처녀 입상들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것을 그대로 베꼈다. 아테네 총독 시절 하드리아누스가 찍어두었던 조각이다. 고임돌을 머리에 인 처녀들은 원래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들보를 떠받치는 기둥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체 조각을 기둥으로 삼는 건축 전통은 언제 나왔을까?

    로마 제정기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 10서>에서 인체 기둥이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그리스 동맹군을 배신했던 카리아의 역사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적을 물리친 뒤 동맹군은 카리아 남자들을 몰살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았는데, 과거의 치욕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영원히 지붕을 이는 저주를 내렸다. 그래서 그후 인체 기둥을 가리켜 `카리아티데' 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세노폰이 쓴 <헬레니카>를 보면 카리아가 테베와 맺은 밀약이 들통나서 스파르타에 의해 유린된 시점이 기원전 370-369년. 오히려 에레크테이온이 건립된 420년께보다 나중의 일이다. 이로써 역사적 사실로부터 건축 명칭이 기원한다는 비트루비우스의 주장은 하릴없이 되었다. 들보를 머리에 인 아테네의 처녀들은 신성한 제의를 시중했을 것이다.

    꼭지3.아마존의 여전사

    그리스 고전 조각의 명장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일이 있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봉헌할 작품을 누가 낼지 솜씨를 겨루는 자리였다. 작품 주제는 `아마존의 여전사'. 심사관을 두지 않고 출품 작가끼리 한 표씩 던져서 당선작을 고르기로 했다. 1차 심사는 무효. 모두 제 이름을 써냈던 것이다. 제정기에 박물지를 펴낸 플리니우스는 400여 년 전 에페소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실감나게 기록한다.

    “결과는 이렇게 나왔다. 출품작가들이 두 번째로 아름답다고 평가하고 하나같이 자기 이름 다음에 써넣은 사람이 우승자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폴뤼클레토스가 우승했고, 피디아스가 2등을, 크레실라스와 퀴돈, 프리드몬이 각각 3, 4, 5등을 차지했다.” 미술사가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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