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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0년08월29일18시51분 KST
    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한겨레/문화생활/노성두의고전미술현장

    [고전미술현장] 대리석이 터질듯 꿈틀꿈틀


    이탈리아 라오콘 군상

    불타는 트로이는 로마 건국의 번제물

    농부 펠리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곡괭이로 흙을 파내자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의 고통스런 표정이 드러났다.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포도밭을 일구던 참이었다. 1506년 1월14일. 전갈을 들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즉시 조각가 상갈로를 현장에 파견한다. 미켈란젤로도 동행했다. 흙을 털고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것은 옛 신화의 한 토막. 서른을 갓 넘긴 미켈란젤로가 고대 예술의 부활을 르네상스의 밝은 눈으로 증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트로이의 마지막 신관 라오콘. 여신 아테나가 파견한 바다뱀에 물려 죽은 비운의 주인공.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의 배를 창으로 찌른 그의 만용이 재앙을 자초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트로이 멸망과 로마 건국을 한 호흡으로 보았던 고대 역사가들은 라오콘의 비극을 고귀한 순교로 바꾸어 읽었다. 불타는 트로이 도성을 빠져나온 에네아스가 로마 건국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으니, `한 도시의 멸망은 다른 도시의 탄생에 바쳐진 번제 제물'이라고 해석했다. 발굴현장을 둘러보던 상갈로의 눈빛이 빛났다. 플리니우스가 쓴 <박물지>의 한 대목이 뇌리에 또렷이 떠올랐다. 실물 크기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 군상은 다름 아닌 로도스 출신의 세 조각가 하게산드로스, 폴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가 함께 제작한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두 아들이었다.

    구경꾼들은 탄성을 질렀다. 예술가들은 전율했다. 르네상스가 여지껏 몰랐던 새로운 조형이었다. 부풀어오른 사지의 근육과 제멋대로 표류하는 뼈대의 긴장을 꿈틀대는 대리석으로 옮겨낸 헬레니즘 바로크의 표현적 수사학 앞에서 그들은 말을 잃고 말았다. 고대 미술은 오직 우미로운 조화와 절제된 숭엄의 형식이라고 알았던 그들에게 라오콘의 격정 형식은 사뭇 생소할 수 밖에. 하루아침에 아프로디테의 감미로운 이념으로부터 라오콘의 절박한 사상으로 건너뛰기란 스튁스 강의 이편과 저편보다 더 까마득했을 것이다.

    라오콘 군상은 소용돌이치는 피라미드 구성으로 짜였다. 활처럼 긴장한 아버지의 척추가 소용돌이의 종축이다. 차가운 바다뱀의 공격을 받은 인간의 뜨거운 절망이 가망 없는 사투를 벌인다. 조형의 이분법은 안으로 조여드는 뱀들의 내향적 공세와 가망 없는 탈출을 꿈꾸는 외향적 수세의 균형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왼편에 선 작은아들은 옆구리가 물렸다. 큰아들은 살아날 수 있을까? 아버지가 큰아들을 돌아보는 순간 뱀은 공격방향을 선회한다. 사제가 뱀 머리를 움켜쥐었으나 손아귀를 미끄럽게 빠져 나온 뱀이 그의 옆구리에 독니를 박아 넣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목신의 그것처럼 헝클어진 수세미가 되고 죽음을 예감하는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때였을 것이다. 라오콘의 힘없이 내뻗은 왼발이 경직되고 근육과 힘살이 간단없이 얼어붙은 것은. 또 하늘을 올려보는 그의 눈에서 빛이 사그라든 것은.

    라오콘논쟁-탄식이냐 비명이냐

    사제의 벌어진 입술을 두고 유명한 `라오콘 논쟁'이 촉발되었다. 예컨대 로마의 건국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사제의 입술에서 하늘을 찌르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썼다. 하지만 렛싱은 라오콘의 입술 모양을 관찰한 뒤에 무거운 비명이 아니라 가벼운 탄식이었다고 반박한다. 게르만의 야만적 덕목이 고통을 감추고 기쁨을 인내한다면, 그리스인의 자연스러운 솔직함은 장작더미 위의 헤라클레스처럼 울부짖어야 당연하다. 그러나 라오콘의 경우, 육체적 고통의 생생한 표현보다는 격정의 바다 깊숙한 곳에서 피어난 고귀한 탄식이 어울린다는 논리였다.

    고고학의 골칫거리-붓으로 그렸거나 청동으로 구운 라오콘

    수많은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고 16세기 이후 미술의 진화 방향을 결정했던 라오콘 군상. 그러나 고고학자들에게는 몹시 난감한 골칫덩이였다. 우선 황금 궁성의 폐허에서 파올린 군상이 진짜인지 여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문헌기록에 언급된 세 조각가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는 데다, 대리석이 원작의 재료로 타당한지가 석연치 않았다. 플리니우스가 <박물지>에서 “붓으로 그렸거나 청동으로 구운 라오콘도 여럿 보았는데 그 가운데 대리석이 제일 낫다”고 쓴 대목에서 청동 원작이 따로 있을 거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청동은 곧잘 대리석으로 베끼지만 대리석을 청동으로 옮기는 일은 드물기 때문. 그러나 그가 보았다는 청동 라오콘이 조그마한 소품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 다른 발굴이 마침내 원작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기에 헬레니즘 조각을 전문으로 모각하는 대형 조각공방이 1957년 스페를롱가에서 발굴되었는데, 라오콘 양식과 기막히게 일치하는 대리석 파편이 무더기로 올라왔다. 그 가운데 스퀼라 그룹을 모각한 파편 한 덩어리가 고고학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라오콘을 제작했던 조각가 세 사람의 서명이 거기에 보란 듯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미술사학자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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