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집 2001.10.24(수) 20:43
기사검색
.

  ▼ 문화생활

여론칼럼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 국제 | 증권 | 문화생활 | 정보통신 | 만화만평

HOME

.

영화/비디오
여행/여가
문학/출판
방송/연예
언론/미디어
예술/공연
종교
추천도서

하니와 함께

오늘의 이메일
뉴스 브리핑
하니 잘하시오
기사에대한의견
한겨레투고

토론

토론기상도
오늘의논객
주제별토론
자유토론방
라이브폴

전체기사
주요기사
지난기사
기획연재

광고안내
사이트맵
신문구독

. home > 문화생활 > 예술/공연

김관호, 천재화가는 불운했다


△ 김관호

한국 첫 누드화 '해질녘' 그려

한국 최초의 누드화 <해질녘>을 그렸던 화가 김관호(사진·1890~1959)의 말년 기록이 북에 남아있는 유가족들 증언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우리나라 제2호 서양화가로 꼽히는 김관호는 1916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공모전인 문전에서 <해질녘>이 조선인 최초로 특선을 차지한 데 이어 도쿄미술학교를 수석 졸업해 근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으나 분단 뒤 그 활동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미술인이다.

북 '국보화가' 김관호 삶 세상에…

<한겨레>가 김관호의 증손자 김영민(43·재미 사업가)씨를 통해 단독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김관호는 식민지 상황에 절망해 1930년대에 붓을 꺾은 뒤 고향인 평양에서 낭인 생활을 했다.

△ 한국 최초의 누드화로 기록된 1916년 일본 문부성전람회 특선작 <해질녘>

그동안 평양에 열었던 삭성회화연구소를 통해 뒤에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장이 된 정관철과 길진섭·최연해·선우담·문학수 5명을 사재를 털어 도쿄미술학교 등에 유학을 보내 후학을 기르는데 애썼다고 한다.

식민지에 절망 30년대 절필 - 작품 국보로…59년 국가장

전쟁중 손자들이 월남해 북쪽 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그는 54년 조선미술가동맹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난 뒤부터 다시 붓을 들어 <모란봉> <해방탑의 여름> 등의 유화를 남기고 59년 10월20일 눈을 감았다. 국가장의로 치러진 장례 뒤 회고전이 열렸고, 그가 남긴 작품들과 그림도구들은 `국보'로 지정돼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정재숙 기자jjs@hani.co.kr

김관호, 천재화가는 불운했다


△ 55년작 <대타령 채전>

춘곡 고희동(1886~1965)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양화가로 꼽히는 김관호(1890~1959)는 분단 이후 북에 남은 그의 삶이 불분명해짐으로써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증발해버린 불운했던 미술가였다. 북으로 간 화가들 활동상과 작품들이 1980년대 들어 해금과 함께 공개된 뒤에도 오래도록 김관호는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6.25 와중에도 고향인 평양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전쟁중 남으로 피난한 손자들 때문에 북에서는 월남민 가족으로 푸대접을 받았고, 남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는 한 때의 천재화가로 기억될 뿐이었다.

우리나라 두번째 양화가였으나 북에선 월남민 가족으로
남에선 흔적 못찾아 오랫동안 잊혀진 이름


△ 손녀가 기록한 '필서'의 일부분

이번에 발굴된 그의 말년 기록은 북한에 생존해있는 구순의 며느리가 올 2월 딸인 김옥순씨에게 구술해 중국 단동에 들른 증손자 김영민씨에게 전해준 `가문의 필서'다. 공책 24쪽 분량이지만 김관호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며느리의 육성이어서 정확하고 세밀하다.

아들을 일찍 잃은 김관호는 손자와 손녀들을 귀여워했으나 아무도 조부의 유업을 잇지 않았다. 김관호는 그 점을 섭섭하게 여겼으나 대신 뒤에 조선미술가동맹의 중심 작가들이 된 정관철과 길진섭·문학수·선우담·최연해 5명을 집에 데려다 미술공부를 시키고, 그들이 기량을 닦자 땅을 팔아 도쿄미술학교 등에 유학을 보냈다고 유족들은 기억했다.

전쟁이 끝나고 살림이 어려워진 김관호 일가는 제자 최연해의 소개로 당시 선전상이던 허정숙을 만났고, 55년 5월께 김관호는 김일성 주석을 보게 된다. 그를 `민족주의자'라 부르며 조선을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려달라는 김주석의 부탁을 받은 김관호는 다시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조수 노릇을 했던 손녀 김옥순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며 모란봉, 대동강 등 조국의 모습을 풍경화에 담았다. 그림을 많이 그리시라고 내가 조를 때마다 `이 세상에 머저리가 있으면 그것이 김관호'라 하셨다.” 절필로 흘려보낸 세월을 한탄하는듯 노화가는 열심이었으나 곧 병석에 눕게 되고 59년 10월20일 눈을 감았다.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유가족 증언으로 그동안 김관호의 사망 연대가 분명해졌고, 제자들을 자비를 들여 일본에 유학 보냈다는 기록도 눈여겨볼 대목”이라며 근대미술사에 구멍으로 남아있던 김관호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홍콩 등지에 흩어져 사는 유가족들은 최근 북한이 대대적으로 제작하고 있는 미술가 시디롬 제작에서 김관호의 재평가가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자료를 들고 서울에 온 김영민씨는 “남에서도 제대로 된 한국근대미술사 서술을 위해 조부에 대한 재발견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재숙 기자jjs@hani.co.kr













↑ 맨위로

.  

여론칼럼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 국제 | 증권 | 문화생활 | 정보통신 | 만화만평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