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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1.12(금) 17:11

역병을 무릎꿇린 근대의학 새로운 고통의 씨앗이 되다


△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신동원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1만7800원

19세기 초, 우리 조상들은 콜레라를 ‘호열자(虎列刺)’라 불렀다. ‘호랑이에게 살점을 찢겨 먹힌다’는 뜻이니, 그 고통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공포다. 몸이 아프기 전에 그 아픔에 대한 공포가 먼저 엄습한다.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는 공포를 ‘관리’했던 무속과 의학과 국가권력의 변천에 대한 이야기다. 동아시아 의학사를 전공한 신동원 교수(44·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는 정치학·역사학·동양철학 등을 넘나들며 그 문명사를 발가벗긴다.

넓고도 깊은 지적 여정을 가능하게 한 힘은 그 눈높이에서 비롯됐다. 지은이는 주로 조선 중기 이후 일제 강권 통치기에 이르는 시기, 고통과 공포로 범벅된 한반도 민중의 곁에 바싹 다가가 앉았다. 그 시·공간에 자리 잡으면 의료 제도와 의사가 아니라, 열악한 시설에 방치돼 죽어가는 환자, 나무에 매달린 채 매장을 기다리는 사망자 등이 보인다. 그들이야말로 고통과 공포의 진앙지이며, 모든 의학의 출발점이다. ‘몸과 의학의 한국사’라는 이 책의 부제는 그래서 ‘서민의 몸과 권력화된 의학의 한국사’라는 숨은 뜻을 품고 있다.

이때의 권력은 근대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늘의 재앙이었던 역병을 통제하는 순간부터 “몸에 대한 근대 권력이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콜레라에 대한 면역력을 갖지 못했던 조선 민중들이 1821년 전국적인 ‘습격’에 노출돼 10만 명이 죽었을 때, 이는 동아시아에 대한 서구 침략의 불길한 신호탄이었다. 그 앞에 무기력하게 손놓았던 한의학의 자리는 근대의 권력으로 무장한 서양의학이 빠르게 대체했다. ‘위생경찰’을 앞세운 일제는 서양의학의 이름으로 식민지 조선인의 몸과 생활을 통제할 근거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그 ‘근대’를 의심한다. “과학적 합리성과 경제력 향상, 이로 인한 위생·건강 상태의 개선을 근대라 한다면”, 식민지 조선은 근대 의학의 수혜자가 아니었다. 노동자 하루 평균 임금이 1~2.5원이던 1929년, 조선총독부 의원은 외래진료비 700원, 입원비 2천원을 받았다. 서양의학은 제국주의 지배자와 소수 조선인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다.

지석영에 대해 지은이가 ‘(허구적) 신화’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에서 우두법을 배운 지석영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통해 전국적 인물로 찬양됐다. 근대적 일본과 낙후된 조선의 대립항에 비춰볼 때, 그는 일본 식민통치를 정당화시킬 훌륭한 모범이었다.

역사에 대한 이런 통찰이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묻혀 버리는 일은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이다. 한의학의 변천과 발전, ‘변강쇠가’ ‘심청전’을 통해 들여다본 조선 후기 의료제도,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진실 등은 지적 호기심을 뿌듯하게 채워준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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