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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0.08(금) 18:15

대처·레이건 집권이 '역사학 위기' 불렀다


△ 과거의 힘­역사의식, 기억과 상상력/ 하비 케이 지음·오인영 옮김/ 삼인 펴냄·1만5000원

역사는 중립적 영역이 아니다. 현실의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공간이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하느냐에 따라서 역사 서술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역사가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며 실천적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비 케이(위스콘신대 교수)가 쓴 〈과거의 힘〉은 이 역사가의 위치와 임무를 최근의 ‘역사 서술’의 역사를 통해서 되새김질하는 책이다.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당시 미국과 영국에 널리 퍼져 있던 ‘역사학의 위기’를 논의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가 보기에 역사학계 안팎에서 ‘역사학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은 수없이 나돌았지만, 그것의 진짜 원인을 제대로 규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역사학계는 위기 담론에 짓눌려 있었고, 패배주의에 젖어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의기소침이 역사학의 임무를 놓아버리는 아주 불행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실에 대한 실천적·비판적 개입을 포기해버린 역사학은 위기를 더욱 증폭시킨다고 지은이는 보고 있다.

60년대 황금기 구가하던 역사학
패배주의에 빠진 원인·성격 고찰
정치적 야심에 맞춰 역사 침해한
80년대 반동적 보수정권이 주범


△  1980년대 보수주의 물결을 일으킨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레이건과 대처는 과거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동원해 보수적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국민적으로 관철하려 했다.

그는 이 책에서 1960~1980년대의 ‘아주 가까운 과거’를 역사학적으로 되살핌으로써 어떤 경로로 ‘역사학의 위기’ 담론이 그렇게 널리 퍼졌고 또 현실이 됐는지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이 위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 역사학이라는 학문 영역 바깥의 정치·경제적 힘들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지은이의 설명에 따르면 1960년대에 영·미의 역사학은 황금기를 구가했다. 과거의 지배계급 중심의 역사학을 탈피해 피지배계급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보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연구가 꽃피었다. 저항과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60년대 젊은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전망을 얻으려는 희망을 안고 역사학 연구에 몰려들어 분위기를 달구었다.

승승장구하던 역사학의 기운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꺾이기 시작했다. 지은이는 그 근원적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서 찾는다. 60년대까지 서구 자본주의 체제는 사민주의(유럽쪽)·자유주의(미국쪽) 정치질서가 이룩한 노동-자본 사이의 타협과 합의에 의해 성공적으로 운영됐지만, 70년대 이후 자본 축적이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면서 이 합의가 깨지고 말았다.

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위기를 증폭시켰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이 노동에 대해 조직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진보적인 이념을 제공하는 역사학은 불신의 대상이 됐고, 기업들은 역사학을 전공한 대학 졸업생들을 의도적으로 기피했다. 역사학 전공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역사학 위기’ 담론이 퍼지게 된 좀더 결정적인 계기는 마거릿 대처(1979)와 로널드 레이건(1980) 정권의 성립이다. 이 두 반동적 보수주의 정권은 내부적으로는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여러 분파가 결합한 것이었는데, 가령 국가나 정부의 권위를 강조하는 신보수주의와 국가의 간섭을 혐오하고 시장의 자유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하나로 엮기기 어려운 두 집단이었다. 이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가능케 한 것이 ‘역사학 위기’ 담론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레이건과 대처는 되풀이하여 오늘의 젊은이들이 ‘역사’와 ‘과거’를 배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역사학 위기’ 담론의 정치적 배경이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 ‘전통의 무게’를 강조하며 역사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해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그 무렵 퍼진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은 역사에 대한 진보·희망을 거부함으로써 보수 지배집단의 역사 오용을 그대로 방치했다. 지은이는 역사학자들이 지배계급의 이런 역사 남용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며, 진정한 자유·평등·민주의 새로운 역사를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되살려 역사학자들이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실천적으로 현실에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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