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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21(금) 18:21

'제국'의 몰락은 거스를수 없는 역사의 흐름


△ 미국 패권의 몰락/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한기욱·정범진 옮김/ 창비 펴냄·1만5000원

지난 3년간 사회과학 출판에서 급성장세를 보이는 분야가 바로 국제정치다. 이런 추세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면서 시작하여 현재 전세계적으로 ‘9·11 출판산업’이라고 부를 만한 추세를 이루었다. 초기에는 프레드 할리데이의 <세계를 뒤흔든 두 시간>과 같은 테러리즘 및 중동관련 책이 주종을 이루더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쟁을 고비로 미국에 관한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미국 패권의 몰락>은 범람하는 ‘9·11의 황하’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역작이다. 여기엔 배경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9·11 관련 출판물은 네오콘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신병적인 저작을 제외하고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 사려 깊게 세계를 경영하자는 미국중심적 ‘신중론’이 있다. 예컨대 이상주의 전통에 선 조지프 나이는 <제국의 패러독스>에서 상호의존적인 세계현실을 감안하여 미국이 개방성과 가치를 중심으로 ‘연성권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제국의 선택>을 쓴 브레진스키는 현실주의 대가답게 미국이 노골적인 지배력보다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헤게모니 행사방식으로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오늘날 미국의 영향력을 예외적인 일탈 또는 비정상이라고 보는 ‘비관론’이 있다. 마이클 만의 <혼돈의 제국>에서 미국은 정치-경제-이념상으로 문제가 많고 완력에만 의존하는 멍청한 군사대국으로 그려진다. 찰머스 존슨은 <제국의 슬픔>을 통해 항구적 전쟁상태가 지속되고 펜타곤이 권력을 지배하며 프로파간다와 허위정보가 판치고 군비지출로 사회분야가 낙후된 암울한 미국의 실상을 꿰뚫는다. 메어리 칼도어의 <전쟁에의 응답>은 미국이 지구화 추세 속에서 변화된 세계역학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안보관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소로스와 같은 자본가도 <미국 패권주의의 거품>에서 비관론의 전도사로 자처한다. 그런데 월러스틴의 저작에 이르면 비관론 계열에 속하면서도 ‘월러스틴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독특한 경지가 펼쳐진다.

세계체제론 미국 운명 조망
'9·11'로 미 패권주의 결정타
본격적인 쇠퇴의 길 접어들어
시민사회 '대안세력'으로 꼽아


△  2001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강타한 9·11테러. 월러스틴은 <미국 패권의 몰락>에서 자신의 세계체제론에 기반한 역사적 원근법을 통해 미국의 유일초강대국 지위가 9·11테러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고 진단한다.

우선 <미국 패권의 몰락>은 올해 일흔 넷인 월러스틴이 평생을 두고 천착해온 세계체제론의 계보에 직접 맞닿아 있다. 그리하여 20세기는 세계체제의 지난 5백년간 궤적 속에서, 그리고 9·11 사태는 20세기 미국의 세계체제 내 위치변화 속에서 이해된다. 월러스틴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체제의 중심부는 주기적으로 변동을 거듭해 왔는데 미국의 경우 1870년대에 등장해서 2차대전 이후 중심 극성기에 이르렀다가 베트남 전쟁과 68혁명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공산주의의 붕괴를 거치면서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지위가 더욱 흔들리더니 9·11 사태를 계기로 결정타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9·11 사태를 최소한 한 세기가 넘는 역사적 원근법 속에 위치시킨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미국 패권의 쇠망이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라고 단언하는 점이다. 이것은 기존의 신중론과 비관론을 뛰어넘는 실로 과감한 역사적 테제다.

내용 중 잘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도 없지 않다. 얄타체제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관점이 그 하나다. 몰락의 근본적 원인으로 헤게모니 속에 헤게모니의 와해조건이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었다는 원리만으로 미국이 직면했던 다양한 도전을 모두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세계체제론과 같은 포괄적 관점에는 그에 합당한 거시적 이해가 필요한 법이다. 우리에게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과제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노대가의 깨우침은 그런 차원에서 예우해야 한다. 또한 세계사회포럼과 같은 자율적이고 진정한 반체제운동으로서의 시민사회를 ‘또 다른 세계’의 희망으로 꼽은 것은 고무적이다. 한 가지 주의사항. 월러스틴이 말하는 ‘몰락’은 아주 긴 세월 속에 나타나는 과정이다. 그의 주장은 미국 영향력의 상대적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이지 미국이 내일 당장 망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변화의 시간적 지평을 ‘장기지속’적 관점에 두어야 한다는 세계체제론의 핵심이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월러스틴이 왜 윌리엄 맥닐에게 이 책을 헌정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을 진정한 사회적 동물로 만드는 것은 집합적 기억, 즉 역사’라고 한 맥닐에게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효제/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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