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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1.30(금) 18:32

헤겔에 갇힌 스피노자 구하기


헤겔 또는 스피노자

피에르 마슈레 지음·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2만7000원

서양의 근대 철학사에서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는 ‘독특한’ 존재다. 네덜란드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대교의 정통관념에 도전해 파문을 당했고, 짧은 일생을 외톨이로 떠돌았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감옥에서 쓴 스피노자 연구서 <야만적 별종>을 “스피노자는 별종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는 단독자·이단자·소수자였다. 이 저주받은 철학자는 데카르트에서 출발하는 근대 서양철학의 주류 계보 바깥에 놓인 비주류였다.

헤겔에 포획되고 이용된 서양근대 이단적 철학자

68혁명 뒤 새로 조명받아 개별존재의 가치 보여줘

독일 관념철학의 거두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은 막강한 독창적 사유를 내장한 이 철학적 이방인을 포획해 자신의 철학 체계의 일부로 삼고, 그를 범신론자의 전형으로 만들었다. 헤겔의 권위에 힘입어 스피노자는 200년 가까이 헤겔이 해석한, 헤겔 체계 속의 스피노자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헤겔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갇히기에는 이 철학자의 힘이 너무 컸던가 보다. 스피노자는 20세기 후반 68학생혁명과 같은 정치적 격변을 통과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이론가인 피에르 마슈레(66)가 1979년 내놓은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스피노자의 부활에 기여한 일군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다. 루이 알튀세르 학파에 속하는 지은이는 당대의 좌익 운동이 절감하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방법의 하나로 스피노자 철학을 내세웠다. 마르크스주의 안에 남아 있는 헤겔주의 유산을 극복하는 싸움에 스피노자야말로 적임자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헤겔 또는 스피노자>는 우선은 ‘헤겔이냐, 스피노자냐’라는 양자택일적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당연히 지은이는 여기서 스피노자의 손을 들어준다. 그는 헤겔이 자기 체계 속에 스피노자를 복속시키기 위해 어떻게 그의 사유를 오해하고 오독했는지, 그리고 그 오해와 오독은 왜 불가피했는지 밝혀나간다. 헤겔에게서 사유는 “자신의 총체화 운동 안으로 다른 모든 질서를 결집하고 흡수하는 절대적인 합리적 질서”이며, 이런 질서 안에 통합된 모든 요소들은 종국적인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시간적·논리적 관계에 따라 위계화된다. 그리하여 헤겔 철학의 목적론적·진화론적 이해 안에서 스피노자는 덜 진화한 철학, 덜 여문 철학, 헤겔에 이르러 종합될 철학적 에피소드로 남는다.

그러나 지은이가 보기에 헤겔의 이런 관점은 자신의 체계를 전제한 뒤 이를 스피노자에게 투사한, 덮어씌운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런 체계 속의 부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스피노자를 터무니없이 오독한 결과이다. 하나의 중대한 사례를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명제에서 찾을 수 있다. 헤겔은 스피노자에게서 찾아낸 이 명제를 놓고, ‘위대한 것을 예고하는 문장’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이 명제에 머물러 있을 뿐, 그 부정의 지양을 생각하지 못한다. 헤겔은 모든 규정이 그 안에 자기부정적 계기를 품고 있어서 그 부정을 통해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스피노자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스피노자다. 스피노자가 ‘규정은 부정이다’라는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유의 힘을 실어 표명한 ‘규정 명제’는 ‘코나투스’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의 주요 저작 <윤리학>에서 밝힌 코나투스(무의식적인 자기보존 충동) 개념은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본질로 한다’는 뜻으로 요약되는 개념이다. 이런 규정에서 모든 존재가 하나의 거대한 체계의 일부를 이루는 헤겔식의 사유와는 전혀 다른, 개별적 존재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 지은이는 헤겔이 자신의 체계를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스피노자의 철학 앞에서 위기를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스피노자를 오독함으로써 그 위기를 넘긴 것으로 이 사건을 이해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 식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구별되는 스피노자의 변증법, 다시 말해 유물론적 변증법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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