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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책과 사람 등록 2003.12.26(금) 18:41

책갈피 사이사이 내일을 비춘 빛들

일제강점기 어떤책 읽었나

근대의 책읽기

천정환 지음

푸른역사 펴냄·1만9500원

임화의 이식문학론은 문학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문학을 포함해 예술·사상·제도 따위 모든 근대적인 것들이 일본이라는 기착지를 거쳐 이 땅에 이식됐다. 그 이식의 모종을 실어나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쓰인 것이 책이었다. 국문학자 천정환씨의 〈근대의 책읽기〉는 일제 강점기라는 강요된 근대화 시기에 어떤 책들이 들어와 어떻게 읽혔는지 실증적으로, 그러니까 역사적 자료들을 샅샅이 뒤져 재구성한 ‘책의 사회사’ 연구서다. 책들의 투쟁은 담론들의 투쟁이며 역사의식의 투쟁이다. 전통관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앞시대의 교양서에 매달리는 동안 근대의 신생 엘리트는 새로운 관념을 익히고 퍼뜨리는 데 힘썼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눈물을 흘리고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를 읽으며 밤잠을 설치는 대중독자들에게 이 시대는 무엇보다 ‘감격시대’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한국현대미술 100년 총정리

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박용숙 지음

예경 펴냄·2만3000원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를 열지 못하고 식민 통치를 통해 서구의 물결을 맞아야 했던 것은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에서 오랜 세월 숙성, 발효되었던 근대성 또는 모더니즘으로도 불리는 거대한 흐름을 단숨에 압축해서 받아들였던 것이 한국 현대미술의 숙명이자 한계였다. 책은 사조와 이념에 대한 고민의 기간을 갖지 못한 채, 또는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수용해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 한국 현대미술의 숨가빴던 지난 100년을 총정리한 서사시와도 같은 미술사 이야기다. 구조적 한계와 치열하지 못했던 의식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난 ‘자생성’을 통해 지은이는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현대 미술의 맥을 찾는다.

구본준 기자

성폭력당한 여성 그리고 조선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안연선 지음

삼인 펴냄·1만3000원

여성학자 안연선씨의 〈성노예와 병사 만들기〉는 ‘종군위안부’로 불렸던 ‘일본군 성노예’의 참혹한 실상을 단순히 증언하기만 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조선 여성들이 성노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일본 청년들을 병사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음을 입증함으로써 ‘여성 문제’와 ‘민족 문제’를 통일적으로 살피는 책이다. ‘위안소’는 식민주의와 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실행하는 장이었다. 조선인 위안부들을 강간하고 학대함으로써 일본 청년들은 ‘남성성’을 확인하고 ‘천황의 전사’로 태어났다. 또 그 폭력행위가 조선인을 유린하는 상징적 행위였던 만큼, 병사들은 그 행위를 통해 일본인의 ‘우월성’을 체득했다. ‘위안부’에 대한 성폭력은 분명히 여성에 대한 범죄행위였지만, 동시에 그것은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범죄이기도 했음을 이 책은 입증한다.

고명섭 기자

바다생물 이야기 흥미진진

현산어보를 찾아서 1~5

이태원 지음

청어람미디어 펴냄·각 권 2만3000원

한 편의 이야기가 책에 깃들면서 이 역작은 다른 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를 품게 됐다. 젊은 고등학교 생물 교사가 200년 전 흑산도로 유배당했던 실학자 정약전의 생물학책 〈현산어보〉(일반적으로 〈자산어보〉로 불린다)의 무대를 직접 찾아가 원전의 내용을 풀이하고, 재해석하고, 자신의 사유를 더해 현대에 되살려낸 이야기는 그 자체가 책으로 쓰여질 법한 또 하나의 ‘이야기’다. 현대의 후학인 지은이와 조선시대의 선배 학자 정약전의 글이 대화하듯 이어지면서 온갖 바다생물들의 이야기가 인문학과 생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구본준 기자

명품 꿈꾸는 '짝퉁' 젊은이들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문학과 지성사 펴냄·8000원

젊은 여성소설가 정이현(31)씨의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는 1990년대 여성소설의 어떤 계보에도 들어가지 않는 새로운 여성형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결혼제도에 반기를 들거나 성적으로 일탈하는 ‘도전적’ 여성이 아니다. 도리어 이들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연애나 결혼의 관습에 철저히 자신을 끼워맞춘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은 60년대식 ‘순응’과도 거리가 멀다. 외모와 배경 등 모든 조건에 가격을 매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가지는 상품성을 지능적으로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자 한다는 면에서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마녀’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들의 ‘야심’을 때로 코믹하게, 때로 신랄하게 벗겨내면서 ‘명품’을 꿈꾸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짝퉁’ 같은 초상화를 날카로운 펜화로 그려낸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여성성, 새로운 지평 만나다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지음

창비 펴냄·6000원

〈도화 아래 잠들다〉는 시인 김선우(33)씨가 낸 두번째 시집이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여성의 ‘몸’인데, 이를 위해 피, 눈물, 양수, 생리혈, 오줌 등의 “짜디짠 문자들”을 동원했다.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은 독특한 여성주의적 시각을 보였다고 평가받은 바 있는데, 이번 시집에서도 여성성과 자궁에 대한 찬양은 이어졌다. 하지만 시인은 자궁의 외연을 오줌과 똥을 누는 기관으로까지 넓혀, 아이를 낳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자궁을 지닌 존재로 바꿔냈다. 한국 문학에서 주로 가부장적 억압의 해체도구로 인식되던 ‘여성성·모성성’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만났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자율주의 실천가의 삶과 사상

아우또노미아

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2만원

‘자본은 영원하다’는 찬가가 지구촌을 뒤덮은 오늘, ‘영원한 것은 자본이 아니라 자율’이라고 되받아치는 목소리들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아우토노미아, 곧 자율주의 운동이다. 그 운동의 실천가이자 이론가인 안토니오 네그리의 생애와 사상을 이론의 형성과 전개의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는 책이 조정환씨의 〈아우또노미아〉다. 자본의 그물이 세계를 포획한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자본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저항과 창조의 능동적 힘들이 있다는 것이 자율주의의 관점이다. 대중의 그 능동적 힘들은 전문적 정치가 집단인 당을 매개로 삼지 않고도 개인 또는 집단끼리 수평적 결합과 협동을 통해 새로운 인류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 그 결합과 협동의 원리, 다시 말해 ‘자율’이야말로 영원하다고 지은이는 힘주어 말한다.

고명섭 기자

시대초월한 '거인'의 메시지

리영희: 살아있는 신화

김만수 지음

나남 펴냄·2만5000원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한 지사이자, 동시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스승으로 꼽힐 만한 ‘어른’으로, 그리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범으로 대중을 일깨워온 언론인. 리영희 교수는 군사 독재와 극우 이데올로기에 맞서 사회가 좌·우 두 날개로 균형 잡고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평생을 바친 ‘거인’이다. 그의 사상, 실천적 면모, 그리고 삶을 총정리한 이 책은 그의 세례를 받지 못한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길잡이라 부를 만하다. 현대사의 시기마다 가장 적확한 시점에 날카롭게 경고음을 울렸던 그의 글들이 적잖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시대를 넘어서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유배와 파직은 다산을 낳고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박석무 지음

한길사 펴냄·1만7000원

다산 정약용이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가 서학에 몰입해 고초를 당하는 운명을 겪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상사의 창고는 지금보다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다산은 권력 쟁탈의 이데올로기 투쟁 도구로 전락한 성리학의 관념주의를 혁파해 공맹의 도를 되살렸으며, 서학의 근대적 정신을 연구해 당대의 현실에 적용했다. 그는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다산 연구가 박석무씨가 오랜 공을 들여 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문학·사상·학문·경세의 드넓은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다산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다산 전기다. 다산은 새로운 것을 향한 끝없는 학구열과 가렴주구에 신음하는 백성을 향한 깊은 동정심 때문에 파직과 유배의 고통을 당하고, 또 그 유폐의 시간 덕에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고명섭 기자

근거없는 편견 바꿔보시길…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까치 펴냄·1만2000원

서구보다도 더 서구중심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며, 약한 나라와 못사는 나라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떨쳐내지 못하는 천박한 인식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굳건하게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타자를 간과하는’ 이러한 편협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있어 이 책의 쓸모는 분명하다. 지은이가 말하듯 ‘지리적으로 공정한’ 관점에서 풀어쓴 50편의 이야기들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더욱 생각해보고 더욱 알아야 할 만한 것들이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사실 콜럼버스의 ‘침략’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은 통쾌한 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다.

구본준 기자

한겨레가 뽑은 상반기 10권의 책

●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이황·기대승 지음, 김영두 옮김/소나무

● 나를 배반한 역사/박노자 지음/인물과사상사

● 남자의 탄생/전인권 지음/푸른숲

● 코리안 엔드게임/셀리그 해리슨 지음, 이홍동 외 옮김/삼인

● 민족과 페미니즘/정현백 지음/당대

● 대한민국사1·2/한홍구 지음/한겨레신문사

●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그린비

●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창권 풀어씀/사계절

● 아, 입이 없는 것들/이성복 지음/문학과지성사

● 더러운 책상/박범신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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