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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책과 사람 등록 2003.05.23(금) 20:06

<민족과 페미니즘> 정현백

페미니즘·민족주의 결별 추세
분단 한국선 "함께 또 따로"로

서양사학자 정현백(50·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씨가 <민족과 페미니즘>이란 책을 펴냈다. ‘여성’ 역사학자이자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 열정적인 활동을 펴고 있는 그인 만큼 이 책의 관심사는 한국 여성운동의 이론적 근거와 실천적 전망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의 강조점으로 읽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결별 요구가 한국적 맥락에서는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는 대목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최근 국제 여성운동과 여성학계의 주류가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결별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런 견해들이 번역서의 형태로 직수입되어 국내 활동가들에게도 내면화하고 있다는 맥락과 닿아 있다. 지난 21일 이 책을 들고 서울 명륜동의 대학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지은이가 “만약 내가 미국의 여성이라면 나는 페미니즘이 민족주의로부터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런 문맥에서다.

국민국가 재형성 과정에서
여성의 몫이 빠지면
여성운동 소그룹운동 전락
여성노동자의 74% 비정규직
세계화 따라 성차별 심화

최근 서구 페미니즘의 주류는 민족주의(=국민국가) 이데올로기가 지닌 가부장적 특성이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밝히는 가운데 민족주의와의 결별을 이야기한다. 지은이 역시 이 책에서 민족주의가 지닌 이런 특성을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요약하건대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불행한 결합’이다. “확실히 역사적으로 민족주의·국민국가와 여성은 ‘불행한 동거’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그가 민족주의와의 결별이 아니라 “함께 그리고 따로”를 이야기하는 것은 국민(=민족)국가 재형성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빠진다면, 그 국가에서 여성운동은 서구의 사례에서 보듯 소그룹운동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멈추지 않고 늘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페미니즘이 이 과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순간, 국민국가 새로 만들기(리메이킹) 과정에서 탈락되고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이 도리어 강화될 수밖에 없는 거죠.”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여성운동이 적극적인 ‘새 판 짜기’를 해내지 않는다면 “여성(여성운동)들은 여성만의 하부문화에 격리된 채 자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서구 페미니즘의 ‘민족주의와의 결별’ 주장이 사실은 미국과 영국·프랑스 등 유럽 중심국가에서 나온 것이며, 유럽에서도 나라마다 양자의 관계가 다양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서유럽과 북미국가들의 경우 시민혁명을 통한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시민’(=남성)의 권리 획득에서 여성은 배제되는 결과를 빚으면서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결별이 진행된 반면, 이른바 국민국가의 독립과 형성이 늦어졌던 유럽 주변국가들은 달랐다는 것이다. 예컨대 핀란드, 노르웨이 등의 민족해방 투쟁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은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양자가 돈독한 연대를 유지했던 이 두 나라의 경우 국민국가(민족주의)는 시민(=남성)주권이 아니라 인민주권론에 뿌리를 두게 되었으며, 이는 이 두 나라가 유럽국가 중 여성이 선거권을 부여받았던 최초의 사례였다는 사실에서 잘 입증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페미니즘이 민족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절실한 이유는 분단 극복과 통일의 과제 때문이라고 말한다. 통일이라는 말이 결국 민족주의를 고양시킨다는 관점에서 ‘탈분단’을 이야기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그것이 종국적으로 분단 고착화로 가게 된다는 점에서 반대한다.

“민족주의와 세계화, 평화와 통일, 그리고 저항 주체와 전략의 문제”를 두루 넘나들며 이를 여성의 눈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이 책에서 지은이는 한국 여성들이 처한 핵심 문제는 여성 노동자의 74%가 비정규직이라는 데에서 잘 나타난다고 말한다. 한국의 이런 성차별성은 자본주의 세계화에 따른 엄혹한 결과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책 끝머리에는 ‘한 여성역사학자가 살아온 시대와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지은이의 자전 ‘연보’가 실려 있다. 역사학자다운 절제된 문장 속에 50년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아오고 만났던 한국 여성운동과 역사학계의 시대상과 시대정신이 긴밀하게 읽힌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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