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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3.11.20(목) 22:21

“정을 버무린다오”


4대가 함께사는 정숙자씨네 김장이야기

김치냉장고가 아무리 잘 익은 김장김치 맛을 내준다 해도, 전통 옹기에 담아 땅 속에 파묻고 제대로 익힌 김장김치 맛만 할까 양념이 깊숙이 밴 신김치의 알싸한 맛에 질깃질깃 씹을수록 오묘하고 깊은 맛을 내는 묵은 김치는 그 무엇으로도 흉내내기 어렵다.

4대가 함께 사는 정숙자(61·서울 송파구 문정동)씨네는 이런 묵은 김치 맛을 포기하지 못해 아직도 뒷마당에 독을 묻고 김장김치를 저장한다. 지난 15일 정씨네 거실에서는 4대가 모여 앉아 싱싱한 배추를 갖은 양념으로 버무리며 김장을 하고 있었다. 정씨는 남편(김광조·63)과 친정어머니(노부례·83)와 함께 건물 3층에 살고, 바로 위층에 둘째아들 현웅(34)씨 가족이 산다.

정씨는 “아들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시동생들과 함께 살아 김장을 1접씩 하고도 갓김치에 파김치까지 담갔지만, 요즘은 50포기쯤 한다”고 했다. 여기에 여든이 넘은 친정어머니가 직접 담그는 백김치까지 더해 겨우 내내 찬거리 걱정은 않는단다. 친정어머니의 백김치는 집에 오는 손님마다 맛있다고 칭찬할 정도여서 정씨네는 김장 때 무동치미 대신 백김치를 담근다.

아들 현웅씨는 “친가와 외가 모두 호남이어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어머니의 손맛이 빼어나다”고 자랑했다. 그는 “결혼 8년째인 아내도 시외할어머니와 시어머니에게서 배워 이젠 혼자서도 김치를 잘 담근다”며, 아내 신원정(32)씨 칭찬도 빼놓지 않았다.

원정씨는 “어른들과 함께 살다 보니 6살짜리 아들 하민이와 3살짜리 딸 하영이가 모두 김치를 잘 먹는데, 그래서인지 잔병치레도 별로 없었다”며 김치 예찬을 했다.

정씨의 남편 김광조씨는 “묵은 김치는 배추와 여러가지 양념, 젓갈 등 이질적인 재료가 어울려 서로 부글부글 부대끼면서 오랜시간 하나로 숙성돼 만들어진다”며, “가족 구성원들도 함께 살다 보면 묵은 김치처럼 서로 부대끼면서 조화를 이뤄가게 되는 것 같다”고 ‘묵은 김치 가족론’을 폈다.

무남독녀인 정씨는 남편이 장남이지만 이해심 많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시동생들 덕분에 27년째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내가 고된 시집살이를 안 당해봐서 며느리에게도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 같다”는 정씨는, “대가족이 별 잡음없이 살아가려면 누구 한 명이 잘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서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증조할머니에서 외증손녀까지 4대가 단란하게 김장을 담그는 모습에서, 젊고 싱싱한 젊음의 맛을 지닌 풋김치와, 경험이 풍부하고 잘 늙은 노인 같은 느낌의 묵은 김치가 한 식탁에서 제각각의 개성으로 식구들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풍경이 연상됐다.

윤영미 기자 youngm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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