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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4.14(목) 16:26

(21) 사자상의 내력을 보면


△ 신화 속 남성은 수렵문화를, 여성은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지금까지도 원시적 생활방식을 지키고 있는 몽골 차아퉁족 남성들이 순록을 잡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4만년을 산 사만이는 행복했을까

지난 겨울 다세대주택에 들어가다가 입구에 놓인 밥그릇을 본 적이 있다. 밤이라 처음에는 누가 쓰레기를 버린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사자상(使者床)이었다. 저승사자를 위해 마련하는 밥 세 그릇, 동전 세 닢, 짚신 세 켤레. 동전이나 짚신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자상이 분명했다. 아니 대도시에도 아직 이런 습속이 남아 있다니! 도시의 사자상은 낯설었지만 사자상의 유래를 담은 신화를 다시금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됐다.

제주도에 가면 <사만이본풀이>라는 무속신화가 있다. 주인공은 주년국의 소사만이. 그는 조실부모하고 거지로 살다가 조 승상의 딸을 만나 결혼한다. 부인이 머리카락을 잘라 쌀을 사오라고 하지만 엉뚱하게도 총을 사 사냥을 간다. 그러나 짐승을 못 잡다가 우연히 만난 백년해골을 모신 뒤 짐승도 잘 잡히고 농사도 잘 되는 등 재수가 좋아진다. 어느 날 해골은 소사만이에게 저승차사가 잡으러 올 테니 온갖 음식을 차리고 옷과 돈을 준비해 대접하라고 한다. 그야말로 천기누설이다. 음식을 받아먹은 저승차사들은 이웃의 오사만이를 대신 잡아간다. 저승 열시왕(염라대왕)이 세 차사를 처벌하려고 하자 차사들은 잘못을 감추려고 저승 장부를 몰래 고쳐 소사만이와 오사만이의 수명을 바꿔버린다. 그 덕에 오사만이는 삼십삼년, 소사만이는 사만오천육백년을 산다. 가장 이야기가 풍부한 창본(남제주군 남원면 위미리 심방 한태주 구연)도 이렇듯 줄거리는 간단하다. 그러나 함축된 신화적 의미는 간단치 않다.

거지 사냥꾼 소사만이
백년해골 모신 덕에
자신 잡으러온 저승사자 대접
죽을 운명 뒤바꾸는데…

우선 의문스러운 것이 소사만이와 아랫녘 조 정승 딸의 만남이다. 조실부모한 거지가 어떻게 승상의 딸과 결혼을 한단 말인가?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 그래서 어떤 판본(변신생 창본)에서는 여자도 보모 잃은 동냥아치로 이야기되는 듯하다. 그러나 부인의 출신성분이 달라져도 <사만이본풀이>에는 달라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부인이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오라고 하자 소사만이가 쌀 대신 총을 산다는 화소(話素)다.

제주도 신화를 조금이라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총을 사는 소사만이의 행위가 그저 사내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쌀을 사오라는 부인의 청도 마찬가지다. <송당본풀이>의 소천국과 백주또, <삼성신화>의 세 을나와 세 공주(18회 참조), 부부는 아니지만 <세경본풀이>의 정수남과 자청비의 관계(19회 참조)를 살펴보라. 이들 신화에서 남성들은 주로 사냥과 연결돼 있고 여성들은 농경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부부가 되어 갈등을 일으킨다. 요컨대 남신은 수렵문화를, 여신은 농경문화를 각각 표상하는 존재이고, 이들의 결연과 갈등은 두 문화의 만남과 충돌을 상징한다. <사만이본풀이>의 소사만이와 부인의 갈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만이본풀이>는 백년해골이 등장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총을 사 사냥꾼이 됐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서 소사만이는 백년해골을 만난다. 판본에 따라 해골은 총에 맞아 죽은 서울 백 정승의 아들이기도 하고, 발에 우연히 차인 정체불명의 해골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남의 해골을 집에 모신 뒤 발복(發福)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남의 해골 모시기와 재수(財數) 혹은 연명(延命), 양자는 대체 무슨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사만이본풀이>의 또 다른 의문이다.

이 난감한 수수께끼를 풀려면 원시적 사회의 두개골 모시기 습속을 되돌아봐야 한다. 중국 윈난에서 미얀마 산악 지역에 걸쳐 거주하는 와족은 다른 종족의 머리를 베어오는 풍습(head-hunting)으로 꽤나 유명했다. 와족은 자신들의 목 자르는 풍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원신화를 덧붙여 놓았다.

와족의 원조(元祖) 부부는 처음에는 올챙이였다가 개구리로, 나중에는 괴물로 변해 동굴에 살면서 동물을 잡아먹었다. 어느 날 멀리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 사람을 잡아먹고는 두개골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뒤 인간의 모습을 한 아이들을 많이 낳는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두개골을 숭배했고 죽을 때 자손들에게 사람의 목을 계속 바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돈이면 귀신도 속인다’ 는
몰염치한 무속 신관은
적나라한 인간의 얼굴
윤리뒤 숨음 원초적 충동이라

소위 문명적 감수성에서 보면 끔찍할 정도로 야만적이지만 와족의 신화와 습속은 우리의 수수께끼 풀이에 몇 가지 끽긴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먼저 머리 자르기와 두개골 숭배가 사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 이들은 동물을 사냥하듯이 사람을 사냥했다. 이것은 분명히 원시 수렵민들의 모습이다. 다음은 이들의 머리 사냥과 해골 숭배 행위가 풍요를 보장한다는 것. 하지만 이 풍요는 단지 사냥감의 풍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와족은 화전농경이 시작되는 3월에서 4월 사이에 목을 잘라온다. 머리 사냥과 두개골 숭배는 원시 농경민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는 뜻이다. 원시수렵사회에서 시작된 습속이 의미를 확장하면서 초기 농경사회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초상 때 저승차사를 위해 차리는 사자상(使者床).



사실 이런 머리 사냥 풍속은 와족만 가진 문화가 아니다. 서쪽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를 거쳐 동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는 원시 농경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습속이었다. 바로 이 습속에서 우리는 <사만이본풀이>의 해골 모시기와 발복의 관계를 풀 수 있는 유력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제주도에 머리 사냥 습속이 있었느냐는 것은 확인할 수도 없고 긴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남의 해골을 모셔서 복을 받는다는 관념 혹은 신앙이 원시 수렵문화의 오래된 소산이라는 사실이다. 소사만이가 굳이 총을 사서 사냥을 나갔다가 백년해골을 만난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유형의 신화인 호남·충청 지역의 <장자풀이>에 오면 두개골 숭배의 오랜 내력은 소실된다. 대신 조상을 잘 모시지 않는 악독한 사마장자가 착하고 현명한 며느리 덕에 저승차사들을 잘 대접하여 목숨을 연장하는 이야기로 변형된다. 남의 두개골 모시기가 내 조상 모시기로 대체된 셈이다.

옛날 악행을 일삼는 데다 조상 제사도 드리지 않는 사마장자가 있었다. 참다못한 조상들이 배고픈 사정을 염라대왕에게 호소하자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염왕의 사자가 중의 모습으로 시주를 받으러 온다. 그러나 사마장자는 중을 때리고 소똥을 바릿대에 담아준다. 보다 못한 착한 며느리가 용서를 빌고 시주를 대신한다.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면 ‘어 이거 <장자못 전설> 아냐?’하는 물음표가 고개를 들 것이다. 그렇다. <장자풀이>에는 분명 <장자못 전설> 모티프가 스며들어와 있다. 하지만 전설과 달리 무속신화는 장자(長者)의 악행에 대한 징치로 달려가지는 않는다. 그 대신 <사만이본풀이>의 본래 서사를 따라서 악한 부자의 면화(免禍) 이야기로 이어진다.

염왕은 사마장자를 잡으러 가기 전에 그의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사마장자의 꿈이 죽을 꿈이라고 며느리가 해몽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해몽한 며느리는 쫓겨나고 대신 점쟁이가 해몽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저승차사가 목숨을 회수하러 올 테니 잘 대접하는 굿판을 벌이라는 것. 결국 저승차사들은 사마장자의 접대를 받고 사주가 같은 이웃의 우마장자를 대신 잡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우마장자는 효성이 지극한 착한 사람이다. 차사들은 할 수 없이 며느리 꾀대로 말을 잡아 저승으로 돌아간다.

<사만이본풀이>와 달리 <장자풀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자풀이>에는 한 매듭이 더 있다. ‘말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잡아가?’, 마지막 부분은 아마도 <장자풀이>를 듣는 청중들의 이런 반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지옥에 갇힌 말의 원망 때문에 사마장자는 병이 들거나 꿈자리가 어지러워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의 원한을 씻어주는 말 씻김굿을 다시 하게 된다. 이 씻김굿 덕택에 말은 지옥을 벗어나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대단원을 맺는다. <장자풀이>는 어디 한 군데 맺힌 곳 없이 원망을 다 풀어 준다. <장자풀이>에는 사마장자와 우마장자의 운명이 맞바뀌는, <사만이본풀이> 식의 억울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다. 악한 사마장자든, 선악의 문제와 무관한 소사만이든 조상을 잘 모시고 저승차사들을 잘 대접한 덕분에 연명을 하거나 사만년이나 산다. 참으로 편리한 신관(神觀)이고 몰염치한 신들이다. 사마장자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판본이 없지 않은 것도 이런 몰염치에 대한 윤리적 반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속의 신들은 비윤리적이다. 푸짐한 향응을 좋아하고 접대를 받으면 반드시 보상을 한다. ‘돈이면 귀신도 속인다’는 무속인들의 문자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무속의 신관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종교 윤리가 아니다. 신화는 본질적으로 윤리 이전의 문제, 혹은 윤리 너머에 있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사만이본풀이>나 <장자풀이>에 그려진 백년해골이나 저승차사의 모습은 접대에 약하고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적나라한 인간의 얼굴이다. 윤리적 인간 뒤에 숨겨진 원초적 충동,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살든 잘 먹고 오래 살고 싶다는 충동. 그러나 충동을 좇아 우마장자의 운명을 훔친 저승차사는, 아니 사만 년이나 산 사만이는 과연 행복했을까?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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