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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3.24(목) 15:39

(18) 탁라국은 어디로 갔을까


△ 제주도 제주시 이도 1동에 있는 삼성혈. ‘구멍’ 신화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신화의 섬, 운명을 뭍에 의지하다

신화의 섬! 요즘 제주도를 즐겨 일컫는 말이다. 제주도의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문화콘텐츠의 이름도 ‘신화의 섬, 디지털 제주21’이다. 신화를 밑천삼아 테마파크를 조성하려는 대규모 사업이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오랫동안 뒷전에 밀려나 문화의 사금파리 대접을 받던 신화가 그야말로 ‘보물단지’가 되고 있는 중이다. 1만8000명이나 됐다는 제주도의 신, 500여편이 넘게 조사돼 있는 제주의 신화. 우리 신화의 보고이자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수수께끼임에 틀림없다.

대륙에서 구국의 영웅 되고도
제주로 돌아온 궤눼깃또
운명에 맞서는 또다른 탁라
이야말로 민중의 산 신화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건너편 솔숲 아래 삼성혈(三姓穴)이라는 곳이 있다. 고(高)·양(良)·부(夫), 세 성씨의 조상들이 솟아 나온 세 구멍이라는 뜻이다. 진한 6촌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왔고, 신라의 박혁거세나 김알지, 가야의 김수로도 하늘에서 내려왔다. 고조선의 환웅도, 북부여의 해씨도, 고구려의 고씨도 모두 하늘이 본적이다. 그런데 제주도의 세 성씨는 구멍에서 나왔다? 뭔가 심상치 않다. 뭍과는 다른 제주섬만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삼성신화를 전해주는 오래된 문헌이 <영주지(瀛洲誌)>다. 제주도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보아 영주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영주지>를 보면 제주섬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갑자기 세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녘 기슭에 있는 모흥혈(毛興穴), 곧 삼성혈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첫째를 고을나, 둘째를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라고 불렀다. 이름이 희한해서 몇가지 해석이 있는데 ‘높은이’·‘어진이’·‘밝은이’처럼 가치를 부여한 풀이도 있고, 앞의 성을 뺀 ‘을나’를 김알지의 알지와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로 풀이한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확정하기 쉽지 않다. 어쨌든 이들 세 사람은 거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며 가죽옷을 입고 사냥한 고기를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흙으로 봉한 나무상자가 동해 바닷가로 떠온다. 세 을나가 열어보니 새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곁에는 옥함을 모시고 온 사자도 있었다. 옥함을 열자 푸른 옷을 입은 방년의 처녀 셋이 나타난다. 옥함 속에는 처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송아지·망아지에다 오곡의 씨앗까지 있었다. 목함(木函)이나 옥함(玉函)이 꽤나 컸던 모양이다. “저는 동해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공주를 얻으셨으나 나이 들도록 짝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시다가 근자에 서쪽 바다에 서린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닿은 것을 보시고, 이는 신(神)의 아들 셋이 내려와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데 마땅한 배필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세 공주를 모시고 가라고 명하시어 여기까지 왔사오니 혼례를 올리고 대업을 이루십시오.” 사자는 이런 말을 전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린다. 세 을나는 하늘의 뜻이라면서 각각 짝을 맺는다.

세 을나의 탄생과 혼인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는데 먼저 구멍에 대한 의문부터 풀어보자. 구멍 이야기는 한반도에서는 낯설지만 제주도나 그 주변 지역에서는 낯익은 것이다. 류큐(오키나와) 남쪽 미야코 섬의 시조는 기소오·후사소오라는 남녀 신인데 이들은 땅 속에서 출현한다. 타이완에 있는 다이얄·파이완족 등 여러 민족의 구전신화에도 땅이나 바위에 있는 구멍에서 각각 남녀가 나와 짝을 지어 민족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후한서(後漢書)>에는 현재 중국 충칭 지역에 파국(巴國)이라는 나라를 세웠던 파씨의 시조가 종리산의 붉은 구멍에서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신화들은 중국의 서남부, 동남아시아, 타이완에서 오세아니아 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삼성신화가 한반도가 아니라 이들 지역과 같은 계통의 신화라는 뜻이다.


△ 고, 양, 부씨 조상들이 솟았다는 삼성혈의 3개의 구멍. 김태형 기자



구멍에서 태어난 세 울나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온
육지 벽랑국 세 공주의 혼인
나라 세우는데 삼성신화라

그런데 하필 구멍인가? 구멍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리 모두가 태어난 구멍이다. 그 구멍은 마치 땅이 생명을 움트게 하듯 새 생명을 내놓는다. 말하자면 여성원리로서의 대지 관념이 땅의 구멍에서 조상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낳은 것이다. 이런 상상력은 대지의 상상력을 촉발시킨 원시농경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이는 유목문화와 친연성이 있는,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강(天降) 신화소와 짝을 이룬다. 실제로 원시농경문화를 지녔던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구멍출현 신화가 두루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삼성신화에서 처녀들이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오는 것도 이런 여성원리와 무관치 않다.

삼성신화의 두 번째 수수께끼는 세 남녀의 짝짓기와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다. 세 을나는 구멍 속에서 나와 수렵생활을 한다. 가죽옷을 입고 사냥한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 그들 문화의 표징이다. 이들은 벽랑국이라는 상상 국가의 공주들이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오고서야 정착을 한다. 오곡의 종자는 농경의 표징이다. 세 을나와 세 공주의 결합은 수렵에서 농경으로, 이동에서 정착으로 문화가 전환되었음을 상징한다. 이들이 결혼 후 화살을 쏘아 살 곳을 정하고 오곡을 뿌려 살림이 풍성해졌다는 다음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구전되는 무속신화를 보면 문화의 변화가 그렇게 원만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송당본풀이>나 <궤눼깃당본풀이>와 같은 당신(堂神) 신화를 보면 사냥을 해먹고 살던 소천국이 도래자인 백주또와 결혼을 해서 살다가 백주또가 아이들을 키우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면서 소에 쟁기 지워 밭을 갈러 보내는데 배가 고프다고 소를 잡아먹는다. 그것도 이웃 소까지. 이 일로 인해 소천국은 백주또에게 이혼을 당한다. 제주 구좌읍 김녕리의 윗당과 아랫당 당신의 유래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결국 두 당신의 성격과 섬기던 집단의 성격이 달랐다는 것을 뜻한다. 두 집단의 성격은 각각 수렵-토착-남성원리(소천국), 농경-외래-여성원리(백주또)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두 문화 집단의 관계가 제주섬의 문화를 구성했던 것인데 소천국과 백주또의 결연과 분리는 두 문화의 갈등과 공존을 상징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속신화의 이런 관계는 삼성신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삼성신화가 본래 무가였다는 학자들(장주근·현용준)의 견해를 참조하면 <송당본풀이> 등과 삼성신화에 반영된 문화는 둘이 아닌 셈이다. 다만 차이는 <삼성신화>에서는 남녀간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삼성신화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특수성이야말로 삼성신화의 세 번째 수수께끼이다.

<영주지>에는 화살을 쏘아 일도·이도·삼도에 거처를 정한 뒤 농사를 시작하자 날로 살림이 풍부해져 인간세계를 이루었다는 것, 그 이후 900년이 지난 뒤에 인심이 모두 일도의 고씨에게로 돌아가 고씨를 왕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탁라로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마지막 대목 때문에 삼성신화는 단지 제주도 세 성씨의 시조신화가 아니라 탁라국의 건국신화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의문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제주도에 국가가 있었다고? 그렇다면 제주도가 독립국이었단 말인가?

역사 기록들은 제주도가 독립국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형태의 국가였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백제 동성왕 때(498년) 백제의 속국이 됐고, 그 뒤에는 신라의 속국이 되어 고후(高厚)·고청(高淸)·고계(高季) 삼형제가 신라의 벼슬을 받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를 보내(938년) 고려로부터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는다. 말하자면 고려의 번국(蕃國)이 되어 나름의 독립을 유지해나갔다는 것. 그러다가 고려의 일개 군(郡)으로 편입된 시기가 1105년이다. 요컨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위성국가로 지내오다가 12세기 초에 국가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세종 때는 제주도의 지배층마저 그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양민화되면서 완전히 한반도의 일부가 된다.

단편적인 기록들이지만 길게 늘어놓은 것은 탁라국의 운명을 더듬어 보려는 뜻이다. 제주도는 세 성씨의 연합단계에서 고씨를 대표로 하는 부족국가로 발돋움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한반도의 간섭을 받은 셈이다. 지배계층은 한반도 여러 국가의 지배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해 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탁라국의 운명이 힘의 근원을 바깥에 두는 신화를 빚어내었으리라. 나라를 세우려는 뜻도 바다 건너 벽랑국왕을 통해 드러나고, 나라는 공주와 결혼을 한 후에야 비로소 세워지고 있지 않는가. 신성성을 섬 외부에서 가져오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부계 혈통을 하늘과 연결시켜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반적인 건국신화의 모습과는 차이가 크다. 뭔가 자신감이 결여된 건국신화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세종 시절 편찬된 <고려사>는 건국 사실을 아예 지워버려 불구로 만들어 놓았으니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러나 상층의 신화였던 탁라국 건국신화의 운명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하층 민중들의 무속신화, 구전신화다. 한반도나 대륙의 상징인 강남천자국에 가서 구국의 영웅이 되고도 다시 제주도에 돌아온 영웅 궤눼깃또의 얼굴에서 운명과 맞서는 또 다른 탁라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신화가 되살아나는 섬, 제주를 생각하노라니 ‘탁라국의 문화적 독립’이란 말이 떠오른다.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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