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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1.09(금) 19:51

거시적 연구와 미시적 연구 사이에서


거시적 연구와 미시적 연구 사이에서

- 한국근대문학 연구사의 진전을 위하여

육사(陸史, 이육사), 상허(尙虛, 이태준), 도남(陶南, 조윤제) 등의 탄생 백주년을 맞는 새해 아침, 군이 내게 물었다. 느낌이 어떠냐고. 우물쭈물했다. 머쓱하여 돌아가는 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쓴다.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언어행위가 말이기에 거기엔 어쩔 수 없는 벽이 있다. 데리다의 말마따나 이를 보강하기 위해 글이 있는 것은 아닐 터이나, 군의 뒷모습이 문득 그런 생각을 갖게 했다.

모두가 아는바 군과 더불어 내 전공은 이 나라 근대문학이다. 다름이 있다면 내가 근대문학이라 부름에 대해 군이 굳이 현대문학이라 우김이라 할까. 그 사이에는 한 세대의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딱하게도 나는 군이, 그러니까 군의 세대가 어떤 선입견(이데올로기)을 가졌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가 공부에 나아갈 때의 선입견이다.

한 작가의 족보라든가, 학교의 성적표, 교우관계, 처녀작, 심지어 어느 술집에서 마셨느냐로 연구의 무게중심이 기울어지기, 이 또한 내겐 부러웠다. 거시적 연구에 익숙해온 내겐 한갓 하늘의 별이다. 그렇다고 저마다의 세대적인 별과 하늘이 있다고 해버리면 그만일까. 역사에 대한 상대주의적 해석이란 그런 뜻만은 아닐 터이다.

무엇보다 나는 ‘국학’을 한다는 선입견에 휩싸여 있었다. 국학이란 무엇이뇨.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이라 함이 그 정답이다. 이런 생각을 내게 가르쳐준 선생이 도남이었고, 그것은 만주벌판에서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선생도 도남이었다. 대학은 학문(과학)하는 곳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 선생은 내게 말했다. 아가야, 아직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단다. 만주벌판 아닌 진짜 대학에서, 라고. 식민사관 극복이 그것이라고. 한국사란 타자의존적 성격으로 규정된다는 날조된 지배자들의 논리를 물리쳐야 한다고. 임화에 의해 제기된 이른바 이식문학사론(移植文學史論)이 아무리 미워도 과학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 이 선입견 앞에 노출된 아이는 오랜 동안 혼자 배회해 마지않았다. 철조망 가시에 여기저기 찔리기도 했고, 무릎에 멍이 들기도 했다. 두 명제가 상호모순성으로 육박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나를 부축해준 것이 또 하나의 스승 막스 베버였다. 그는 내게 말했다. 아가야, 과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도식(거대담론)이 요망된다, 라고. 이상형(아이디얼 타이프)도 그런 것이란다, 라고. 현실의 역사상(歷史像)이란 무한히 잡다한 요소의 조직물이기에 어떤 의미상도 순수한 모양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러기에 순수모델을 상정하고 그것과의 거리와 차이에 의해 산정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에 그 비현실성이 곧 이념형 개념의 본질이라는 것. 이 가르침에 따라 나는 국민국가와 자본제로 근대의 문학사를 구성하고자 힘썼다.

이러한 이념형의 처지에서 보면 근대문학에 관한 약간의 새로운 자료발굴이란 별다른 의미를 두기 어렵다. 문학사적 안목 자체가 거대담론(리얼리즘)의 일종인 까닭이다.

그렇지만 소련연방이 무너진 ‘역사의 끝장’ 이후에 등장한 군의 세대의 처지에서 보면 사정이 썩 다를 터이다. 문학사란 성립되지 않는 것, 설사 성립되더라도 한갓 사소한 파편(모더니즘)에 지나지 않는 것. 그러기에 그것은 많은 파편들과 동렬에 놓이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 파편들은 그 자체로 독자적이자 완전한 것이니까. 그러기에 군에겐 아무리 사소한 자료일지라도 집채만큼 큰 물건으로 보일 터이다. 이런 선입견이 군의 세대를 지배하고 있을 터이며, 거기에서 펄쳐지는 것이 이른바 미시적(微視的) 연구태도이리라. 한 작가의 족보라든가, 학교의 성적표, 교유관계, 처녀작, 심지어 어느 술집에서 마셨는가에로 연구의 무게중심이 기울어지기, 이 또한 신선하여 내겐 부러웠다. 설사 아무리 부럽더라도 거시적 연구에 익숙해온 내겐 한갓 하늘의 별이다. 그렇다고 저마다의 세대적인 별과 하늘이 있다고 해버리면 그만일까. 역사에 대한 상대주의적 해석이란 그런 뜻만은 아닐 터이다. 군에게 이런 말을 해두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곧 저 미시적 연구를 가능케 한 것은 경제규모 세계 13위의 이 나라 국력의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니었을까. 그 원동력 속엔 식민지사관 극복의 이념적 힘도 작동되어 있지 않았을까. 미시적 연구와 거시적 연구, 이 둘이 마주치는 접점에 군과 내가 마주하고 있을 터이다. 다음번엔 그러기에 내가 군에게 물어보아도 되지 않겠는가. 군의 정진을 비는 까닭이다.

김윤식/문학평론가·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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