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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한참 멀어진 2001년


전 세계 주요 언론들이 2001년 지구촌의 `키워드'(열쇳말)로 `테러'와 `전쟁'을 꼽았듯이, 올해는 분쟁과 갈등이 두드러진 한해였다.

9·11 동시다발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에 반대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테러 지지'라는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각국에 강요하며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뿌리깊은 민족·종교 갈등도 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은 지난 1년여 동안 1천명 이상 숨지는 유혈사태를 낳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 역시 위태롭기만 하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 사이의 대립 역시 두드러졌다. 몇해전부터 `세계화 대 반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표출돼온 이 갈등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충돌 이상의 폭발력을 내부에서 키워가고 있다. 과연 갈등과 분쟁의 끝은 어디인가?

◇ 미국과 지구촌 갈등 = 조지 부시 미국 공화당 행정부는 1월20일 출범한 이래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일방적이고 패권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해 국제사회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부시 행정부는 먼저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한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도 자국 경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국제사회가 이미 합의한 교토의정서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것이다. 이런 모습은 환경단체는 물론 동맹국인 일본과 유럽연합 등으로부터도 거센 비난을 샀다. 4월1일 남중국해에서는 미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어 부시 대통령은 미사일방어(엠디) 체제 구축을 강행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해 중국·유럽연합 등으로부터 세계의 전략적 불안정을 유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임 빌 클린턴 행정부 때와 달리 부시 행정부는 `당사자 원칙'을 내세우며 악화하는 중동의 유혈사태에 적극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일방적인 이스라엘 편들기로 나타났다. 이는 부시 대통령이 취임 뒤 중동사태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는 만났지만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반과는 만나지 않은 데서도 드러났다. 오히려 미국은 중동의 폭력사태를 끝내는 데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팔레스타인 쪽을 비난했다. 이런 태도가 9·11 동시다발 테러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은 동시다발 테러 이후 테러의 근원을 성찰하기보다는 군사력을 통한 보복의 길을 선택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다른 나라의 도움이 필요해지자 다자주의로 바뀌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탈레반 정권이 붕괴하는 등 아프간 공격이 성과를 보이자 다시 일방주의로 돌아갔다. 이런 태도는 아프간 공격이 사실상 마무리된 12월13일 수십년간 군비억제의 틀로 작용해온 탄도탄요격미사일(에이비엠)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 유대교와 이슬람교 모두 성지로 여기고 있는 이스라엘 동예루살렘의 신전언덕에서 지난 7월29일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을 해산시키려는 이스라엘 경찰에 신발 등을 던지며 맞서고 있다. 예루살렘/AP 연합

◇ 질긴 민족·종교분쟁=지난해 9월 팔레스타인의 2차 인디파다(봉기)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올 한해 내내 증오와 무력충돌의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이스라엘의 극우 강경파 아리엘 샤론 총리는 암살정책을 가속화했고 팔레스타인은 자살 폭탄공격으로 맞섰다.

특히 12월1~2일 예루살렘 등지에서 팔레스타인의 연쇄 자살 폭탄공격이 발생한 이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자치정부 본부를 미사일로 공격하는 등 충돌이 한층 거세지고 있다. 지난 1년여의 무력충돌로 12월 중순 현재 양쪽 사망자는 팔레스타인 809명, 이스라엘 223명 등 1천명을 훌쩍 넘어섰다.

12월13일 인도 뉴델리에서 발생한 국회의사당 총격으로 인도·파키스탄은 지구촌 `제1의 화약고'로 급부상하고 있다. 카슈미르 독립문제를 놓고 50년 이상 갈등을 겪어온 두 나라는 최근 국경지대에 미사일을 증강 배치하는 등 전쟁준비 태세에 들어간 상태다.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는 21세기에도 인종차별 철폐가 여전히 지난한 과제임을 확인시켜줬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유대민족주의(시오니즘)을 비난하는 내용의 선언문 초안에 반발하며 대표단을 철수시켜 국제적 빈축을 샀다.


△ 지난달 10일 독일 베를린에서 4천여명의 반전·반세계화 시위대가 `전쟁과 세계무역기구에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베를린/AFP 연합

◇ 반세계화 =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질서의 강화에 맞서는 많은 세력들이 나라의 울타리를 넘어 반세계화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다. 8월20일 이탈리아 제노바에선 세계 각지에서 모인 15만여명이 주요8국(G8) 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발포로 1명이 숨졌다. 시위를 우려해 내년 G8 정상회의 개최국인 캐나다는 로키산맥의 산악도시에서 회의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11월10일엔 카타르 도하의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 맞춰 독일과 스위스 등 유럽지역에서 반전·반핵·반세계화 시위가 동시에 일어났다. 독일의 시위대가 내건 “전쟁 대신에 연대와 정의를”이라는 플래카드는 이들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12월 6~8일 스웨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상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디디에 셰르피텔 국제적십자연맹 사무총장은 테러의 뿌리를 빈곤과 결핍으로 지적하고 “테러의 실제 원인은 일차적으로 정의와 불의, 남북 격차, 빈자와 부자 사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재권 황상철 기자jjk@hani.co.kr

전진의 발걸음도 있었다


△ 지난달 초 아프가니스칸 칸다하르 부근 마을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온몸에 상처를 입은 뒤 가족과 함께 파키스탄 국경을 넘은 한 여자 어린이가 퀘타의 병원에서 힘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퀘타/AFP 연합

올해 지구촌이 반목과 갈등으로만 얼룩졌던 것은 아니다. `평화와 공존과 정의'를 향한 작지만 의미있는 발걸음이 곳곳에서 디뎌졌다.

북아일랜드에선 10월23일 영국의 이 지역 지배에 격렬하게 저항해온 구교파 준군사조직 아일랜드공화군(IRA)이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무기를 놓기 시작했다. 30년째 계속돼온 이 지역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8월1일엔 중앙아프리카의 소국 부룬디가 8년에 걸친 유혈분쟁을 종식시킬 길을 찾았다. 부룬디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중재로 다수족인 후투족과 소수족인 투치족의 공동정부를 출범시켰다. 부룬디는 1993년 후투족 출신의 첫 민선 대통령 멜시오르 은다다예가 투치족에 의해 피살된 뒤 내전이 발발해 지금까지 20여만명이 숨졌다. 공동정부의 출범은 부룬디뿐 아니라 르완다·콩고민주공화국·우간다·탄자니아 등 이웃한 몇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후투-투치족 사이의 싸움 해결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12월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여성법정'은 군대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유죄를 선고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국제 민간법정의 이 판결은 비록 법적 강제력은 없으나 성노예제와 강간 등 전쟁범죄를 양심과 도덕의 힘으로 심판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필리핀에선 1월20일 `피플 파워'(인민의 힘)가 부패 혐의를 받아온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몰아내고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을 새 지도자로 맞았다. 아로요는 이로써 코라손 아키노에 이어 필리핀 사상 두번째 여성 대통령이 됐다. 인도네시아에서도 7월23일 부패한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불렸던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메가와티는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이자 민주독립투사로 대접받는 수카르노 전 대통령의 맏딸이다. 정재권 기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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