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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1년01월08일19시35분 KST
    한겨레/사회/근본을세우자

    [근본을세우자] 학벌보다 능력을

    'OO학교 출신' 간판이 평생을 좌우해서야…
    공직부터 벤처까지 동문따라 줄서기
    입시-취업-승진 '전쟁'

    올 2월 부산대 졸업을 앞둔 성아무개(26)씨는 우리사회에서 학벌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성씨는 토익 880점에 대학 평균학점 3.7점을 얻었지만 이른바 서울 명문대 출신들과의 경쟁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취업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지난 9월말. 서울로 올라와 신촌에 하숙방까지 얻은 뒤 대기업에서부터 벤처기업까지 무려 19곳의 문을 두드렸다. 하루 종일 피시방에서 인터넷 지원서를 작성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16곳은 `면접을 보자'는 연락도 없었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3개 회사도 면접관들이 “지방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들어 채용하지 않았다.

    “출신학교가 곧 능력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입사지원서의 최종 학력과 학교란을 보면 이제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학벌=능력'이라는 편견은 기업들이 `수시채용'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요즘 더욱 강화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앞다투어 채택하기 시작한 이 제도는 필기시험 없이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해 직원을 뽑는다. 이 과정에서 출신학교가 제1의 선발기준이 된 것이다.

    사회 첫 관문부터 시작된 학벌에 따른 차별화는 조직 내부로 들어가더라도, 중요 요직을 소수 대학 출신들이 독점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지난해 11월말을 기준으로 조사한 `국내 100대기업 최고경영자의 출신대학별 분포'를 보면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 등이 싹쓸이하고 있다.

    이런 학벌중시 풍토는 `기술과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를 건다'는 벤처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공채경험이 전혀 없는 대다수의 벤처기업들은 이른바 `신분조회'를 통해 직원들을 채용한다. 하지만 `신분조회'는 사실상 `내 후배 뽑기'에 다름 아니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솔직한 얘기다. `보드카(서울대)', 연빛(YONVIT·연세대)', `고대벤처클럽' 등 벤처기업 최고경영자들의 출신학교별 모임은 이런 세태를 반영하는 유력한 증거다.

    공직사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행정부 요직은 말할 것도 없고 선출직인 국회의원마저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 독점한다. 국민의 대표라지만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 전체의 56.8%에 이를 정도다.

    이처럼 계급화된 학벌사회는 청소년들을 `학벌따기 경쟁'에 몰아넣고 있다. 청소년들은 이른바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갖가지 학원에 다녀야 한다. 심지어 멀쩡하게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시험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 서울 노량진 대성학원의 경우 지난해 수강생 5천여명 가운데 대학 휴학생이나 자퇴생이 1천여명에 달했다.

    한마디로 18~20살 사이의 청소년기 학과성적과 대학선택이 한 개인의 `생애'를 결정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에서 자기계발을 어떻게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대학을 졸업한 뒤라고 예외는 아니다. 일류 대학원에 적을 두려는 경쟁이 또 남아 있다. 서울 ㄷ대 출신의 방아무개(27)씨는 재수까지 불사하며 지난해초 서울대대학원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공부를 더 해보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세칭 삼류라는 굴레를 벗어보려는 욕심이 더 강했다”고 실토했다.

    학벌주의는 `패거리 문화'를 수반한다. 인격이나 능력보다는 동문이라는 사실 하나가 사람에 대한 평가와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곽아무개(31)씨와 김아무개(31)씨는 지난해 4월 ㅇ증권사를 그만뒀다. 서울 ㄱ대학 출신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회사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탓이다. “증권분석 파트에서 일하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니며 노력했지만 번번히 ㄱ대학 출신들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고 곽씨는 말했다. 간부들이 드러내놓고 자기 후배들을 편애하는 분위기는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자사 직원들의 추천을 받아 사원을 채용하는 `사내추천제도'를 채택하는 기업이 늘면서 직장 안의 학벌문화도 심화되고 있다.

    고려대 현택수(사회학) 교수는 “패거리 문화는 이른바 일류대학 출신 뿐만 아니라 이에 맞서야 하는 다른 대학 출신들의 `뭉치기' 현상으로 비화되고 있다”며 “학벌 중시풍토가 온 나라를 극단적인 소집단주의와 이기주의로 몰고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강남규 기자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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