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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시각 2001년01월04일22시02분 KST
    한겨레/사회/근본을세우자

    [근본을세우자] 정부 '공정한 중재'부터

    구제금융 한파가 몰아치던 97년 말, 노동자와 사용자는 양보와 타협으로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자고 다짐했다. 정부도 노사정위원회를 꾸리고, ‘신 노사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사회적 합의’는 빛이 바랬고, 노사관계 역시 타협과 양보를 통한 위기돌파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겨레>가 2001년을 맞아 실시한 ‘한국사회에 대한 국민의식’ 여론조사(전국 남녀 1000명 대상, 95% 신뢰 구간 오차범위 ±3.1%) 결과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조사결과 노사관계에서 기본과 원칙이 공정하게 잘 지켜지고 있다(그래픽2)고 응답한 사람은 `매우 그런 편이다' 0.3%, `그런 편이다' 8.5%, `보통이다' 31.8%순이었고, `그렇지 않다'(45.4%)거나 `전혀 그렇지 않다'(8.2%)는 답변은 절반이 넘었다.

    외환위기가 막 시작되던 97년 11월 휴대전화 생산업체 ㈜오트론 노-사는 파격적인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노동조합은 향후 3년동안 임금·단체교섭 중단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력을 다짐했고, 회사쪽은 근로조건과 고용안정 보장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노-사 화합선언 직후부터 장기근속자를 중심으로 한 권고사직 등이 잇달아 진행됐다. 빈자리는 신입사원들로 채워졌다. 이후 이 회사는 98년 ‘6·18 기업퇴출’ 대상기업으로 결정된 뒤 7월23일 폐업신고에 이어 4일만에 회사이름을 ㈜한화정보통신 구로공장으로 바꿔 가동했다. 이때 경영진은 200여명의 노동자들을 계약기간 1년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재입사시켰다. 노동자가 위기를 함께 헤처나갈 동반자가 아니라 ‘정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경제위기를 위해 치뤄야 할 고통도 분담되지 않았다.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8년째 근무하는 박선모(34)씨는 “실패한 경영자가 책임을 회피한채 1년이 넘도록 해외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노동자들은 차가운 거리로 내몰렸다”며 “고통을 분담하자던 정부가 부실경영자들에게는 왜 이리 관대하냐”고 질타했다.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구조조정의 원칙이 도전받기 시작하면서, 90년대 중반 이후 사그라들던 노동쟁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노동부가 집계한 ‘2000년 노사분규 현황’을 보면 지난해 발생한 전체 노동쟁의 건수는 246건(그래픽1)으로 99년 같은 기간 198건에 비해 27% 가량 늘었다. 쟁의 참가자도 18만여명으로 99년의 9만215명에 비해 2배가량 늘어 파업강도가 세졌으며, 쟁의로 인한 근로손실 일수도 37% 증가한 185만312일에 달했다.

    민주노총 신현훈 쟁의국장은 “최근 3년간 발생한 노동쟁의는 새로운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며 “늘어가는 빈부격차와 정리해고, 실업생활을 거쳐 비정규직으로 전락해가는 노동자들의 반발이 전면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노사관계 전문가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노동쟁의는 기본적으로 ‘노·사문제’가 아니라 ‘노·정문제’라고 말한다. 정부의 밀어부치기식 정책집행이 구조조정의 전제조건이었던 ‘사회적 합의’를 무너뜨리고, 노사관계의 힘의 균형을 한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경남대 임영일 교수(사회과학부)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지속되는 경제위기로 사용자쪽이 무리한 압박을 가하더라도 노동자는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며 “여기에 노동계의 대표격인 두 노총이 정부·사용자 대표와 합의한 사항까지도 하루 아침에 뒤집히다 보니 전체적인 노사관계의 틀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진단했다.

    지난 연말을 뜨겁게 달군 국민·주택은행 노조의 파업사태도 합병 뒤 예상되는 정리해고나 임금삭감 등에 대한 반발 때문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관치금융’을 않겠다던 정부는 ‘낙하산 인사’로 은행장을 임명해 실망을 줬고, 강제합병은 하지 않겠다고 합의한 바로 다음날 얼굴을 바꿔 합병을 선언해버렸다. 결국 두 은행 노동자가 혹한 속에서도 농성을 지속한 것은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스스로 땅에 떨어뜨리며 ‘사회적 합의’을 저버린 정부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던 셈이다.

    노동자를 여전히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사용자의 시각도 큰 문제다. 99년에 이어 두번째 노동조합 설립을 추진하다 지난해 11월 삼성에스디아이에서 해고된 김갑수(37)씨는 “조합 설립 움직임만 나와도 관련자를 회유하고 심지어 해외전출 등 부당인사도 서슴치 않았다”며 “노동자를 대화와 협력이 아닌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정부가 추진하는 새로운 노사문화냐”고 꼬집었다.

    인하대 윤진호 교수(경제통상부)는 “경제 전반에 걸친 위기의식과 정부주도의 구조조정이 사용자쪽의 불법·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되고 있다”며 “위기를 자초한 정부가 이제라도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을 회복하고 신뢰할 만한 대화채널을 재가동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인환 기자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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