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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3.24(목) 18:54

박정희 글씨 어떻게 해야 하나


전국에 1200점…항일·임란관련 15건

삼일문, 광화문, 윤봉길 기념관, 안중근 기념석 등 각종 문화재와 기념물에 쓰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가 잇따라 논란이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제 강점기에 항일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나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운 애국자들의 유적에는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24일 <한겨레>가 문화재청의 ‘전직 대통령 필적 현판 현황’을 분석한 결과, 박 전 대통령이 쓴 현판과 기념비 34건 가운데 임진왜란과 항일투쟁에 관련된 곳은 절반에 가까운 15건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한산도 충무사, 아산 현충사 현판 등 이순신 장군 관련 글씨가 12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박 전 대통령 스스로 깊이 존경한데다, 독재 시절 이데올로기 장치로 활용된 탓이 크다는 분석이다. 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애국자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부산 충렬사 현판 등 3건은 임진왜란·정유재란과 연관됐다. 일제 때 항일투쟁과 관련된 유적은 이번에 부숴진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가 있었다.

이밖에 서울 동작구 사육신묘 현판 등 8건은 충신 등의 유적, 제주 항몽순의비(삼별초의 몽고에 대한 항쟁 기념비) 등 2건은 외세에 대한 항전 유적, 광화문 현판 등 3곳은 왕실과 연관됐다. 그밖에도 6건이 더 있다.

문화재에 쓴 대통령 글씨 가운데 박 전 대통령의 글씨는 43건 중 34건(79%)으로 가장 많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3건, 노태우·최규하 전 대통령은 각 2건, 윤보선·김대중 전 대통령은 각 1건에 그쳤으며,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화재에는 필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밖에 각종 기념물에도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서울 은평구 구파발 ‘통일로’ 비석 등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1989년 민족중흥회가 펴낸 박 전 대통령 휘호집 <위대한 생애>를 보면, 그는 집권 18년 동안 전국에 1200여점의 글씨를 남겼다. 해마다 66점 이상, 매주 1점 이상 쓴 셈이다.

물론 이 많은 박 전 대통령의 글씨를 모두 문제삼고 철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도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의 글씨라고 해서 모두 철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항일과 관련된 인물이나 유적에 남아 있는 박 전 대통령의 글씨에 대해서는 먼저 철거를 검토해야 한다”며 “나머지 글씨들은 문화재의 가치와 역사성 등을 고증해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 교체하고 따로 보관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번 박 전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교체를 밝혔다가 보수 언론들에 맹타를 당한 문화재청은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다. 문화재청의 한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박 전 대통령이 문화재에 쓴 현판 글씨를 바꿀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절차도 간단하지 않다. 문화재에 쓴 박 전 대통령의 글씨를 바꾸려면, 국가·지방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실제로 수원 화령전(정조의 사당)의 운한각 현판은 지난해 12월 경기지방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서예가 정도준씨의 글씨로 바뀌기도 했다. 문화재가 아닌 기념물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직권으로 교체할 수 있다.

서우영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박 전 대통령이 문화재에 쓴 글씨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옳지는 않지만, 이번에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역사적인 평가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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