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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3.11(금) 09:42

광화문, 인간에게 녹색불을 켜다


△ 서울 종로구 세종로 네거리에 동서간 건널목이 놓여, 시민들이 아랫쪽에 뚫린 지하도로 내려가지 않고 건널 수 있게 됐다. 강창광 기자

[현장] 38년 만에 횡단보도 다시 놓인 서울 세종로 네거리

목숨을 거는 무모함을 무릅쓰지 않고도, 도로교통법을 어기지 않고도 시민은 서울 세종로 아스팔트 위를 걸어 지날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응원전 때, 87년 민주화항쟁 때 잠시 차들은 사람들에게 그 길을 내준 적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북악으로부터 경복궁과 광화문을 거쳐 뻗어내린 너비 65m의 ‘국가상징거리 광화문 세종로’의 주인은 그동안 사람이 아니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세종로 아스팔트 위에서 기자는 이순신 동상을 올려보다 광화문을 바라보고 그 너머 청와대와 북악산을 조망했다. 함께 세종로 횡단보도를 통해 광화문 네거리를 횡단하는 사람마다 처음 누리는 ‘보행인의 자유’가 활기로 묻어났다.


“처음 이렇게 건너봐요. 신기하네요, 신기해.”
“상상도 못했지요, 기분 좋네요!”
“편해요, 좋아요! 내가 건너는데 차가 서 있고.”
“얼마나 좋아요? 지하도로 들어가기 싫잖아요?”
“신호가 조금 짧아서 뛰지만 좋아요. 진짜 명물이예요.”
“신호를 조금 기다려도 편하고, 엄청 좋아요.”
“우리는 지하로 가기 싫어요. 공기도 안좋고.”
“세종로 한가운데 서서 청와대와 북악산쪽 사진을 꼭 찍고 싶었어요.”


△ 38년만에 다시 놓인 세종로 네거리 건널목을 시민들이 건너고 있다. 김순배 기자



시민들 “편하다, 좋다”…세종로 횡단보도는 ‘유쾌한 놀이터’

대형버스도, 반짝이는 검은색 고급 승용차도 광화문 세종로 네거리 횡단보도 앞에 멈춰섰다. 지난 7일, 현대해상~교보빌딩, 광화문빌딩~동아일보사 사이 동서방향 횡단보도가 38년 만에 다시 놓인 서울 세종로 네거리. 신호등은 인간에게도 녹색불을 켰다. 빨간불은 자동차를 멈춰세웠다. 9일 오후, 세종로 횡단보도는 시민을 위한 유쾌한 놀이터였다.

세종로 네거리 동서방향 17차선, 약 65m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 지난 1967년 10월 음습한 괴물같은 지하도로 쫓겨났던 시민들은 38년 만에 햇볕이 비치는 세상 밖으로 다시 올라섰다. 사람들은 세종로 네거리를 동서로 가로질러, 지난 1999년 놓인 남북방향 횡단보도를 건넜다. 대한민국 상징거리에서 동서남북으로 내딛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도시가 인간에게 돌아가는 현장이었다.

“차를 피해 지하도로 다니다가 사람이 우선이 된 기분이에요.”
“차 위주에서 보행자에 대한 배려도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차를 몰지만, 차 막히는 것만 생각하면 안되죠.”
“차가 아니라 시민이 우선이죠.”
“택시 몰기에는 불편하지만, 나만 생각할 수 있나요. 매일 차만 모는 것도 아닌데.”
“차 막히는 것만 생각하면 안되죠.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 세종로 네거리에 동서 방향 건널목이 놓여, 한가운데서 서서 청와대와 북악산쪽을 볼 수 있게 됐다. 김순배 기자 



“도시가 자동차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는 변화”

“자동차의 지배에서 자동차와 인간의 ‘공존’으로

17차선을 가로지르는 횡단보도. 이것은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통학과 원제무 교수의 설명처럼 “자동차 위주에서 인간 중심으로 가는 커다란 도시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다. 도시연대 김은희 사무국장은 “이제는 사람이 도시에서 주인이 되는 과정의 큰 변화다”고 평가했다.

새로 놓인 동서방향 횡단보도는 딱 57초 자동차를 멈춰세웠을 뿐, 곧 자동차에 길을 터줬다. 자동차는 세종로 네거리 어느 곳에서든 우회전 2개 차선은 횡단보도를 설치했지만 차량 지체를 막기 위해 신호등을 두지 않았다. 신호등은 없었지만, 자동차는 사람을, 사람은 자동차에게 차례로 순서를 내줬다. 자동차와 인간의 타협과 조화, 둘 사이 ‘공존’의 선택이었다.

현장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정민준 경장은 “길 건너는 사람들 표정이 밝아졌다. 차가 막힐 것 같았지만, 교통흐름은 이전과 거의 똑같고 운전자들이 적응하면 훨씬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은희 도시연대 사무국장은 “자동차를 몰아내자는 게 아니라, 자동차와 사람이 공존하는 것이다. 타협하되, 사람이 우선일 뿐이다”고 설명했다. 한양대 첨단도로연구센터 임삼진 연구교수는 “지금까지 도시에서 자동차는 인간을 지배해왔지만, 이제 자동차와 인간의 공존으로 바뀌고 있다. 자동차와 인간이 공존하는 성숙된 사회는 자동차가 몇초 늦게 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행벨트 완성과 맞물려 “인간중심 도시정책 이어가야”

인간이 숨쉬는 ‘녹색도시 혁명’을 위해 달리자

세종로 네거리 동서방향 횡단보도는 자동차와 인간이 공존하는 첫 걸음일 뿐, 완성은 아니었다. 횡단보도 가운데 보행섬에 멈춰섰을 때, 자동차는 무섭게 기자의 앞뒤를 쌩쌩 내달렸다. 세종로 네거리를 맴돈 지 약 3시간. 기자는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어야 했다. 콧구멍과 목은 간질간질했다. 얼굴에는 무엇인가 자꾸 달라붙어 찜찜했다. 횡단보도 신호는 여전히 짧아보였다. 인간은 도시에서 자동차에 여전히 포위돼, 움츠러들었다. 이제 다음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세종로 같은 대표적 상징거리뿐 아니라, 동네에도 횡단보도를 설치하면서 ‘우리동네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넓혀가야 한다. 횡단보도 하나 설치했다고 박수칠 게 아니라, 인간의 안전과 편의 등 보행을 위한 최적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거리가 단순한 통행이 아니라, 사람이 거리와 문화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김은희 사무국장)

“차량의 홍수, 높은 건물 위주의 도시에서 생활속의 아름다움을 찾는 도시로 바뀌어야 한다. 대중교통 개혁으로 도시의 교통량을 줄이고, 자동차의 배출가스를 줄여나가야 한다.”(임삼진 연구교수)

“광화문축을 중심으로 도시가 보행자 중심으로 바뀌는 출발이다. 세종로 17차선 도로를 6개 차선만 남기고 줄여서 인간중심의 도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소외되는 느낌이 작아진다. 광화문이 시민들의 축제공간으로 태어나려면 곳곳에 횡단보도를 놓고, 인간중심으로 도시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를 이어가야 한다.”(원제무 교수)


△ 세종로 네거리 동서 방향 건널목은 양쪽 2개 차선은 건널목에 신호등을 놓지 않아, 사람이 건너도록 하면서도 건널목 설치에 따르는 차량정체를 줄였다. 김순배 기자 



오는 9월까지 광화문~서울역에 이르는 세종로·태평로·남대문로에는 좁은 보도가 2~6m씩 넓어진다. 사람들은 지하도로 내려가지 않아도, 경복궁, 청계천, 덕수궁, 남대문시장까지 다닐 수 있게 된다. 숭례문 주변에는 2500평의 광장이 만들어지고, 4개의 횡단보도가 설치돼 ‘보행벨트’가 만들어진다.

임삼진 교수는 “보행권을 회복하면서 도시 곳곳에서 변화를 낳고, 꿈과 희망의 녹색도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거대도시 서울은 시청광장이 만들어지고, 청계천이 살아난다. 이제 ‘녹색도시 혁명’에도 녹색불이 켜졌다. 이제 횡단보도를 건너던 세종로를 내달릴 차례다. 인간이 살아 숨쉬는 녹색도시를 향해서. 자동차처럼 쌩쌩~.


“모래시계형 신호등으로 바뀌었으면”

신호등 없는 우회전 차선에 자동차와 사람 뒤섞이기도


△ 광화문~서울역 사이의 보도에는 차도를 줄이고, 보도를 넓혀 보행권을 확보하는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김순배 기자

세종로 동서방향 횡단보도는 57초의 신호를 줬지만, 길어서인지 사람들은 서둘러 뛰어 건너는 보행자가 많았다. 또 실제로 걸음이 빠르지 못한 노인들은 57초 안에 미처 길을 건너지 못하기도 했다. 횡단보도 길이가 긴 만큼, 중간에서 쉬었다가 가는지, 한꺼번에 건너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신호등이 최근 늘고 있는 ‘모래시계형’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세종로 네거리 교보빌딩 앞 사적 171호 비각 때문에, 남북방향 횡단보도가 세종로 네거리쪽으로 30여 미터 당길 수 없었지만, 시민들은 “문화재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이해보다는 혼란스러워하고 불편해했다.

또 신호등이 없는 우회전 2차선에 더러 자동차와 사람이 서로 먼저 지나가려고 하면서, 뒤섞여 위험하기도 했다. 시민들 중에는 세종로를 X자형으로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설치됐으면 하는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또 보행자들이 중간에 쉬게 되는 보행섬이 좀더 넓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두운 밤에는 사고가 날 위험도 있으므로 대책도 세워야 한다”는 택시기사의 지적도 있었다.

일부 택시는 교보문고 앞 우회전 차로에 승객을 태우기 위해 길게 줄을 서, 대형버스 등이 지나칠 때 경적을 울리며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현대해상 앞쪽에 차선을 줄이고 보도를 넓히는 곳에서 공사를 하던 인부들은 “사람 다니라고 보도를 넓혔는데, 노점상들이 다 차지할 것 같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인부들은 “이명박 시장이 이런 것 잘하니까 대권 홍보가 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세종로 네거리 주변에 보행환경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 중이어서,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조금은 어수선함이 남았다. “손님이 절반 이상 줄었다”는 지하도 상인도 안타까웠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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