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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사회 등록 2005.02.17(목) 18:38

조작· 살인으로 이어간 ‘정권연장의 꿈’


밝혀야 할 국정원 과거 (3)국가보다 ‘정권’안보

2003년 8월 법원이 수지 김(본명 김옥분)씨의 유족들에게 “국가가 42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뒤 국가정보원은 국민 앞에 이렇게 약속했다.

“앞으로 업무 수행에서 인권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생각하고 법과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등 낮은 자세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민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이 말 속에는 ‘정권의 정보기관’으로 기능했던 이들의 과거 모습이 읽혀진다.

국정원 홈페이지(nis.go.kr)에서 ‘국정원의 발자취’를 클릭하면, 국정원 스스로 널리 알리고 싶어하는 과거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중정과 안기부 시절 굵직굵직한 간첩 검거 성과가 특히 눈에 띈다. 이들 사건 가운데 발표 당시 전국을 뒤흔들었던 민청학련, 인혁당 등 몇몇 사건은 빠져있다. 그동안 ‘국민의 인권과 생명을 담보로 조작한 정권 안보용 사건’이라는 의혹을 받아 온 사건들이다. 국정원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국정원 자신도 떳떳하게 성과로 내세우지 못하는 사건들임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3선개헌·10월유신 반대세력 ‘공포정치’ 로 진압
‘동백림 사건’ 제보자조차 “터무니없다” 경악
최종길·장준하 구체적 사망정황 여전히 안갯속

시국 전환용 사건 부풀리기=“1967년 5월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2시간 동안 만나 동베를린에서 유학생들이 북한과 접촉하고 있는 실상을 털어놨고, 그때부터 동백림 수사가 시작됐다.” 동백림 사건 수사의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임석진(73·명지대 명예교수)씨의 얘기다.

그동안 이 사건은 ‘몇몇 인사들이 북한에서 친지들을 만난 사실을 두고 중정이 간첩단으로 엮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그러나 임씨는 “평양을 오가며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아 쓰고 정보를 넘겨주는 등 간첩활동을 한 이들이 포함돼 있었지만, 중정이 그 주변 인물들까지 엮어서 사건을 키웠다”며 “날이 갈수록 관련자가 터무니없이 불어나 나도 몹시 놀랐다”고 했다. 일부 실체가 있긴 했지만, 사건을 중정이 의도적으로 부풀렸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동백림 사건을 부풀렸다는 의혹은 당시 정권이 처한 위기상황에 비춰 설득력을 얻어왔다. 이 사건이 발표된 1967년 7월은 박정희 정권이 6월8일 총선에서 3선 개헌선(원내 3분의 2)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부정선거를 치른 뒤, 대학가를 중심으로 규탄시위가 번져가던 때다.

실제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가 7차례에 걸쳐 윤이상, 이응로를 비롯한 유학생, 예술인 등 194명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대남적화 공작을 벌이다 적발됐다고 발표하자 전국은 공안 분위기로 얼어붙었다. 그러나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부정선거 시비가 있기 훨씬 전부터 현지에 요원을 파견해 북한의 대남우회공작 추진 실태를 파악하고 있었다”며 부정선거 무마용으로 사건을 터뜨렸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당시 중정은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외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요원들을 파견해 유럽에 살고 있던 사건 관련자 17명을 한국으로 납치해 온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과 큰 외교적 마찰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사건 당시 윤이상씨의 변호사였던 하인리히 하노버는 96년 독일의 한 법학전문지를 통해 “한국 정보부원들이 당시 유럽에 살던 한국인 17명을 한국으로 납치하는 과정에서 서독 정보기관이 협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동백림 관련자들은 70년 12월에 사형수들까지 모두 풀려났다. 박 정권의 3선 개헌작업이 모두 마무리된 시점이다.

반 정권은 친북, 용공=반유신 대규모 학생시위가 준비되고 있던 1974년 4월3일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유신에 반대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공포한다. 곧이어 중정은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고, 긴급조치 4호가 협박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듯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세력으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을 사형 확정 판결 20시간만에 모두 처형한다.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하재완씨는 1심 재판 최후진술에서 “중앙정보부의 과잉 충성으로 내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사건 조작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들이 사형당한 지 27년만인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민혁명당재건위 사건은 중정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건 당시부터 관련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고문·조작 의혹을 국가기관이 사실로 인정했고, 중정이 지하조직을 날조해 정권에 반대해 온 8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법살인’했다는 혐의는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당시 6국장으로서 수사를 책임졌고 1981~1988년 국회의원을 지낸 이용택(75)씨는 “인혁당은 1차 때부터 존재했다. 1차 인혁당 때 주도자였던 김아무개는 월북해 한동안 대남방송을 계속했다”며 고문·조작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의문의 죽음들=최종길(당시 서울대 법대)교수와 재야 지도자 장준하씨의 죽음은 중정이 30여년 동안 ‘살인 혐의’를 받아 온 사건들이다. 1973년 10월19일 중정 건물에서 투신 자살한 것으로 발표된 최 교수의 죽음은 의문사위 조사 결과 중정 수사관들의 고문이 있었던 사실은 인정돼 자·타살 여부에 관계없이 ‘법률적으로 고문치사’란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정황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족들은 지난 1월26일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산행 중 실족사한 것으로 알려진 장씨의 죽음은 박정희 정권을 앞장서 비판해 온 재야 지도자란 이유로 중정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으나 의문사위에서도 진상규명 불능 결정이 내려졌다. 장씨의 장남 호권(56)씨는 “중정이 직접 살해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중정이 당시 아버지의 모든 일정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와대 경호실 등 다른 기관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중정에서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을 만났을 때 ‘자네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중정 관련성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 사회부 김인현·이순혁·박주희 기자, 정보자료부 박숙경 기자
알림 : 이 시리즈는 모두 9차례 예정입니다.


‘서울수몰’불안 부추겨 “직선제 열망 잠재우라”

북 금강산댐·남 평화의 댐

1986년 말 정부는 “북한이 88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도권을 물바다로 만들기 위해 ‘200억t 물폭탄’을 저장할 수 있는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이후 이에 대응할 평화의댐 건설계획이 발표됐고, 63빌딩 허리까지 물이 차고 국회의사당이 지붕 밑까지 잠기는 그래픽과 함께 관련 기사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기업들은 물론 초등학생들의 코묻은 돈까지 성금 모금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북, 올림픽 방해하려 댐 건설” 발표·대응댐 모금
93년 감사서 ‘전두환 지시·댐규모 조작’ 드러나

안기부는 성금모금 성과를 높이기 위해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운동을 미루도록 했고, 기업체에 10억~7백만원까지 성금을 강제로 할당했다. 그 결과 6개월만에 661억원이 걷혔다. 평화의댐은 88년 1단계 공사 뒤 2004년 말 홍수조절 목적으로 26억3천만t 규모로 증축됐다. 한편, 금강산댐은 88올림픽 15년 뒤인 2003년 말, 200억t의 1/10 규모인 26억2천만t 규모로 완공됐다.

김영삼 정부가 등장한 1993년 안기부는 창설 32년만에 처음으로 외부 감사를 받았다. 평화의댐 건설공사 의혹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였다. 감사원은 감사 결과 “1986년 당시 안기부가 금강산댐의 건설규모와 담수량에 대한 정보를 조작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평화의 댐 건설이 추진됐다”고 발표했다. 추진 배경에 대해 감사원은 “대응댐 재원 확보보다 시국안정 및 국면전환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치중한 사실이 안기부 내부 문건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86년 말 끓어오르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공 위협으로 잠재우고, 평화의댐 성금 모금 열기로 국면을 전환하려던 저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북한의 수공 위협 시나리오의 근거가 된 ‘높이 215m, 저수량 2백억t’이라는 금강산댐의 규모는 안기부 요청을 받은 한국전력공사 4급 직원 1명이 8시간만에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해 낸 수치로 드러났다. 안기부가 청와대에 낸 2차 보고서에는 ‘댐의 높이가 155m, 저수량이 70억t’이라고 수정됐지만, 정부는 애초 발표대로 평화의댐 건설을 밀어붙였다.

93년 9월 국회 건설위의 안기부에 대한 국정조사에서 김덕 부장은 안기부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평화의댐 추진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씨는 “평화의 댐은 88올림픽을 무사히 치르기 위한 필수적 조처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안기부 2차장을 지낸 이학봉(67)씨도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일본과 미국의 전문기관에서도 금강산댐의 최대 담수량을 200억t으로 추정했기 때문에 그에 맞춰 단계적인 댐 건설을 건의한 것”이라며 “정권이 바뀐 뒤 평화의댐을 금강산댐 저수량에 맞춰 증축한 것만 봐도 대응댐 건설의 필요성이 입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기수(71·전 한국과학기술원 시스템공학연구소장)씨는 “86년 발표 당시 금강산댐의 담수 능력으로 봤을 때 수공 가능성은 없다는 보고서를 과학기술처에 냈는데 과기처에서 이유없이 보고서를 사장시켰고, 1년 뒤 한 신문에서 이 보고서를 발굴해 보도했으나 안기부에서 다른 언론의 보도를 통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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