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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사회 등록 2005.02.01(화) 13:14

‘한-미 우호’의 아랫도리… ‘양공주’들을 민간외교관으로 활용하다

인종차별 갈등 일자 ‘기지촌 정화사업’ 실시

1971년에는 서울을 불안에 떨게 하는 워싱턴의 성명이 유독 많이 나왔다. 주한미군 수를 줄이고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었던 기지촌은 매번 뒤흔들렸다. 업주들과 ‘비즈니스 걸’들은 그악스러워졌고 주민들의 불만도 커졌다. 설상가상 영내 흑백갈등이 고스란히 영외로 옮겨졌다. 주도권을 백인이 쥐고 있으니 주민들은 백인 입장에서 흑인을 차별했고, 흑인은 백인에게 당한 설움까지 주민에게 분풀이했다. 이런 긴장은 1971년 7월9일 평택 안정리의 캠프 험프리에서 폭발했다.

안정리 사건, 흑백갈등의 대리전

50여명의 흑인이 5개 지역 기지촌 클럽에 들어가 업소를 때려부수며 날뛰었다. 흑인 차별에 대한 항의였다. 주민들은 낫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그들을 쫓아냈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흑인들을 기습하기도 했다. 미 군경과 한국 경찰은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며 이들을 진압했다. 그 주말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캠프 험프리 정문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10명의 미군과 20명의 한국인이 다친, 당시로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동맹속의 섹스>, 삼인 펴냄).

1970년대 초반 기지촌은 한-미 동맹이 공고했던 곳이 아니라 극단적 충돌이 내재된 곳이었다. 안정리 사건은 흑백 갈등의 대리전이었다. 미군 당국은 비즈니스 걸들을 인종갈등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실제 백인과 흑인 전용클럽은 나뉘어 있었고 백인 상대 여성과 흑인 상대 여성은 섞이지 않고 위계도 뚜렷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꺼내든 카드는 ‘기지촌 정화사업’이었다. 그는 1971년 12월22일 기지촌 정화정책을 공식화하고 청와대가 직접 챙기도록 지시해, 각 부처 차관급을 중심으로 정화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즈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민군관계 소위원회에서도 인종차별 금지와 성병률 감소가 주요 과제였다. 소위원회는 요구사항을 제시했고, 정화위원회는 집행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미국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꾀했고, 한국은 이미지 개선과 주한미군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데 효과를 거뒀다. 문제는 돈과 인력이 모두 한국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점잖은 SOFA 소위원회에서 클럽 운영방식과 비즈니스 걸들의 접대 방식이 심각한 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권고안도 나왔다. 성실한 호스티스가 손님과 어울릴 때 차별을 삼가도록 훈련하는 것, 흑인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균형 있게 선곡할 것, 인종적으로 공격적이거나 배타적인 간판을 걸지 말 것 등이었다.

좋은 ‘서비스’에 정부가 발벗고 나서

대통령이 직접 챙긴 덕에 기지촌은 점점 쾌적한 쾌락의 도시로 바뀌었다. 도로가 확장되고 가로등도 늘고 뒷골목 클럽들은 대로변으로 옮겨졌다. 범죄 단속도 강화됐다. 정화사업이 탄력을 받자, 미국은 성병 문제를 들고 나왔다. 비즈니스 걸들을 등록시켜 정기 검사를 받게 하고 성병에 걸린 이들은 격리하라는, 우리의 현행법과 정면 충돌하는 요구였다. 윤락행위 등 방지법은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결국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정기 의료검진과 성병 진료소 시설 개선, 감염 여성 억류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미군 상대 성매매를 ‘잘’ 하기 위한 환경 정비에 정부가 팔 걷고 나선 모양새였다.

비즈니스 걸들은 민간 외교관으로도 활용됐다. 미군 당국은 공식 문서에서 “(성매매 형태의) 친교는 부대-지역 관계의 핵심에 가깝다”면서 “남성-여성의 친교가 많아질수록 미국인은 한국인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보고하고 있다(미8군 ‘인적요인조사보고서’, 1965). 한국 정부도 미군의 성욕 해소가 한-미 우호를 돈독히 한다고 믿었다. 각 지역에서 비즈니스 걸들의 자치회가 조직됐고, 이들은 시장, 경찰, 보건소장 등이 주최한 교양 모임에 참석해 더 나은 ‘서비스’를 다짐했다. 대통령의 독려 속에 비즈니스 걸들이 한-미 동맹을 다지는 동안 세상은 그들을 ‘양공주’라 손가락질했다. <한겨레21>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표지이야기]박정희 X-파일  14면
    <한겨레21>은 장장 60쪽에 이르는 ‘박정희 표지특집’을 선보인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26년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 한국 사회에서 활개친다. 한-일 협정 문서 등 ‘박정희 시대’의 비밀도 하나둘 밝혀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질 예정이다. 1979년 10월26일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도 개봉된다. 2005년, 우리는 왜 박정희인가. <한겨레21> 기자들이 총동원되어 ‘박정희 시대’와 그가 남긴 유산을 취재했다.

    22면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
    여자 문제에서 기자에게 박치기를 했던 에피소드까지. 한때 막걸리를 즐겨 마시며 서민의 표상이 됐던 그가 시바스리갈을 마시며 망가지기까지. 당시 김재규쪽 변호사와 청와대 출입기자의 증언을 토대로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를 재구성해본다.

    32면 대통령이 남긴 흔적들
    박정희는 18년간 전국 각지에 친필 서예작품 1200점을 남겼다. 1주일에 한번씩 휘호를 남긴 셈이다. 이는 그 어느 명필이나 임금을 능가하는 숫자다. 그는 왜 그토록 많은 글씨를 남겼나. 그 솜씨는 어떠했나.“서예가 소전에게 지도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36면 박정희와 한나라당 파워게임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그와 절연할 것인가. 박정희와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는 한나라당 내 대권게임의 전초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2007년 대선의 최대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박근혜에겐 과연 유리한 것인가.

    66면 설날 퀴즈큰잔치
    내가 쏘면 퀴즈 개시야, 땅!
    박정희 특집호의 하프타임에 찾아온 2004 설 퀴즈큰잔치. 자동차, 노트북, 대형TV…. 그 시절 각하의 하사품같이 푸짐한 퀴즈 경품이 쏟아진다. 너무 어려운 문제도 없다. 그때 그 시절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세 가지 퀴즈, ‘하면 된다’ 정신으로 잘 풀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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