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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2.13(일) 21:39

뽕밭이 ‘콘크리트숲’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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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강 흐름과 잠실 변천사



  •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강에는 많은 섬과 드넓은 백사장이 있었다. 수천만년의 세월 속에서 퇴적과 침식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고 다시 생기곤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공유수면 매립과 한강 종합개발은 강물의 흐름을 크게 바꿔놓았다.

    ‘근대’라는 세월 통해 서울 한강의 섬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살펴보고, 주민들의 이야기도 들어본다.

    ① 잠실도·부리도

    “해마다 한가윗날에는 잠실섬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 일찍 차례를 마치고 새내마을 공마당에 모였어. 400명도 훨씬 넘었지. 동네별로 모여 음식을 차려먹고 공을 차다 보면 한강 위로 휘영청 둥근 달이 떴는데 …!”

    유태선(45)씨는 아직도 잠실섬의 세 마을인 새내(신천), 잠실, 부렴마을(부리섬) 사람들이 모두 모였던 한가위 잔치를 잊지 못한다. 이곳에서 부리도까지 달려갔다 오는 마라톤 시합을 마치고 나면 푸짐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전벽해’란 말 그대로 뽕나무밭이던 잠실섬은 사라지고, 한쪽은 강, 한쪽은 개발의 신천지가 됐다. 200여 가구나 됐던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였던 새내마을 공터도 강물 속으로 잠겼다.

    한강개발로 반은 강, 반은 신개발지 변화
    “마을잔치 열던 공동체 터전은 어디로…”

    원래 한강은 송파에 접어들면서 신천강(새내)과 송파강(남쪽)으로 갈라져 큰 섬인 잠실섬(360만평)과 그 서남쪽의 작은 부리섬(30만평 가량)을 빚었다. 또 잠실 왼쪽에는 무동이라는 또다른 작은 섬이 한강 흐름의 변화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다. 부렴마을이 있던 부리섬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잠실과 백사장으로 연결됐다.

    예전의 한강은 광진교를 지나 남북으로 갈라져 흘렀다. 남쪽의 물길(송파강)은 현재의 석촌호수와 지하철 2호선 신천역 남쪽을 거쳐 잠실종합운동장 자리에서 탄천과 합쳤다. 북쪽 물길(신천강)은 현재 한강과 비슷한데, 너비는 절반 이하로 좁았다.

    잠실·부리섬이 육지로 된 건 한강 공유수면 매립 사업 때문이었다. 1971년 남쪽으로 굽어돌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섬을 75만평의 육지로 만들었다. 잠실 북쪽은 물속으로 가라앉혀 신천강의 너비를 넓힘으로써 지금의 지형을 만들었다. 이 사업 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주변 터와 합친 340만평에 잠실아파트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돼 세 개발지로 변했다.

    옛 잠실섬 사람들은 빈한한 삶을 살았다. 물 때문이었다. “메기가 하품을 하거나, 개미가 침만 뱉어도 물에 잠겼다”던 이곳 사람들은 여름이면 홍수를 피해 현재의 광진구 자양동으로, 강남구 삼성동의 봉은사로 대피했다. 하지만 가난은 공동체를 엮는 끈이 됐다.

    “비가 오면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어. 청평댐이 갑문을 열면 사람들은 세간을 버려두고 돈대(홍수를 피하기 위해 만든 높은 터)로 모였어. 거기서 배를 타고 뭍으로 향했지.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있었던 미군 부대에서 헬기를 띄우기도 했는데 ….”

    마을사람들의 공동노동으로 쌓은 돈대는 물난리 때 피난처 구실을 했고, 보통 때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노는 쉼터였다. 부렴마을 돈대는 높이 3m에 넓이가 400평이나 됐는데, 버드나무가 많아 여름 내내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잠실 사람들은 1972~73년에 토지 보상을 받고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태선씨는 “등기를 가진 집이나 땅은 원래 평수의 40~45% 정도를 잠실7동 새마을에 대토받았고, 등기가 없는 경우는 주거가 가능한 최소한의 땅만 불하받았다”고 말했다.

    새내마을 사람들은 보상받은 돈으로 지금의 잠실본동 새마을 시장 옆으로 와 집을 지었다. 이곳은 새내마을의 이름을 이어받아 ‘신천’이 됐고, 새마을 시장도 ‘새로 지은 마을’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 76년 새마을 시장 앞에는 잠실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잠실대교 쪽에 생긴 시영아파트 등을 합해 모두 2만5천여가구였다. 외지인들이 들어왔고, 새내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신천’을 떠났다.

    현재 잠실 1~7동과 신천동이 된 옛 잠실섬은 3만911가구 8만5777명이 사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애초 200가구였던 것이 200배가 늘었고, 인구는 1000여명에서 80배 늘었다.

    잠실섬의 새내·잠실마을은 잠실주공 1·2·5단지 앞 한강 둔치부근에 자리잡고 있었고, 부리섬의 부렴마을은 잠실7동 정신여중과 아시아공원 근처에 있었다. 옛 송파강 모래사장에는 국내 최대 실내 놀이시설인 롯데월드가 들어섰고, 112층 555m의 세계 최고층으로 짓겠다는 제2롯데월드 계획도 야심차게 추진되고 있다. 잠실종합운동장은 탄천과 한강이 합류되던 물길 언저리에 들어섰다.

    강원도에서 굽이굽이 뗏목이 떠내려 왔던 옛 한강 본류의 모습을 추측하게 하는 건 송파강을 일부 남긴 석촌호수뿐이다.

    젊은 시절을 잠실섬에서 보내고, 아직까지 콘크리트로 뒤덮인 ‘신천’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상재(62)씨는 공동체의 터전을 흔적도 없이 쓸어 간 ‘개발시대’를 원망했다.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처럼 한강을 되돌릴 수 있을까? 허 참! 돈 벌려고 멀쩡한 아파트를 부수고 재건축하는 마당인데. 그래도 그 시절 한강의 금모래밭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면 우리도 좋고 서울 시민들도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뽕밭은 잠겼어도 ‘공동체 정’ 오롯이

    ■ 그때 그 잠실 사람들은 지금…

    매립사업뒤 새 마을 180여가구 ‘뿔뿔이’
    20여년 계모임·애경사 상조회 끈끈
    “엣 마을 잊지말자” 대동제·상신제도

    1970년대 잠실지구 종합개발 계획으로 잠실섬은 지도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지만, 가난 속에서도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섬 사람들의 인정은 아직도 살아있다.

    잠실섬에는 새내마을과 잠실마을, 그리고 부렴마을이 있었다. 새내마을은 100여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고, 잠실마을과 부렴마을에는 각각 30여 가구와 50여 가구가 살았다. 부리섬은 잠실과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어 사실상 같은 생활권이었다.





    △ 섬과 백사장으로 이뤄졌던 잠실섬과 부리섬(오른쪽·1971년 항공사진)은 한강종합개발 과정에서 육지와 연결돼 잠실종합운동장과 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섰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잠실섬이 사라졌던 70년대 초는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로 인해 마을 공동체가 급격히 사라지고 있던 때였다. 동시에 60년대 후반부터 추진되던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흑석·동부이촌·압구정·구의동 등 강변 마을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잠실섬은 송파강 물막이 공사가 끝난 71년까지 서울에서 마을 공동체가 온전히 살아 있던 곳이었다. 잠실섬 새내마을에 살았던 유태선(45)씨는 “마을이 사라질 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파출소 하나 없었다”며 “정부로부터 근대 산업화의 혜택을 받지 못한 까닭에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을 지키다 보니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실섬의 각 마을은 스스로 범죄를 막기 위해 밤마다 청·장년 6~7명으로 ‘야경’을 조직해 순찰을 돌았다. 집마다 순번을 정해 이들의 새참을 준비했다. 유씨는 “제 집 식사 때는 김치밖에 없었지만, 이날은 꼭 고기반찬을 준비했다”고 했다.

    새내마을에는 우물이 있었다. 고기를 먹고 체한 사람에게 효험이 있어 서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봄 우물을 청소하고 사람들이 던져놓고 간 동전을 모아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했다.

    잠실섬 사람들은 72~73년 잠실본동 ‘새마을’로 이주를 시작했고, 30여년이 흐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세 마을 사람들은 끈끈한 유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특히 이웃이 상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는 새내마을의 ‘계’는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신천동 계의 홍흥인(64) 회장은 “아직도 계원이 상을 당하면 100여 가구 대표가 한명 이상씩 나와 모두 장지까지 함께 간다”며 “서울에 이런 풍습이 남아있는 건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조에 38~39가구씩 3조로 이뤄진 신천동 계는 각 조에서 한집씩 차례로 ‘소임’과 ‘도가’를 맡는다. ‘소임’은 모든 계원들에게 부고장을 돌리고, ‘도가’는 출상 때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 장지에서 먹을 음식부터 영구차까지 계에서 부담하니, 상주는 돈 쓸 일이 없다.

    홍 회장은 “예전에는 30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 능동까지 가는 장례 행렬이 장관이었다”며 “지금도 애경사가 있으면 한사람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새내마을 사람들은 2001년 사라진 마을을 기억하기 위해 송파구 잠실본동 잠실 근린공원에 새내마을 내력비를 세우고 매년 10월3일 이곳에 모여 대동제를 연다.

    부렴마을 사람들도 음력 10월 초하룻날 잠실7동 아시아공원에 세워진 부리도 기념비 앞에서 상신제를 올린다. 부렴마을의 주된 소득원이었던 뽕나무는 매립공사 때 한그루도 살아남지 못했다. 상신제를 올렸던 500년 넘은 뽕나무도 사라졌다. 김창국 부렴마을 기념사업회장은 “예부터 이어져 온 상신제를 한번도 거른 적이 없다”며 “지금은 잠실7동장을 제주로 모시고 뽕나무에 제사를 드린다”고 설명했다. 잠실마을 사람들도 최근 잠실향록회라는 향우회를 조직해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잠실의 유래

    조선 양잠업 축…세종 직접 관장도


    잠실(蠶室)이란 누에를 기르는 지역이란 뜻이다. 명주를 만들어내는 누에는 하늘이 내린 벌레라고 해서 천충(天蟲)이라고도 불리며 매우 신성시됐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양잠업을 육성하기 위해 왕이 잠실을 세우고 이를 직접 관장했다. 각 지역에 설치된 잠실마다 실을 뽑아서 승정원에 바쳤고, 정교함과 수량에 따라 상을 주거나 벌을 줬다. 서울에도 세 개의 잠실이 있었다. 서대문구 연희동 쪽에 있는 곳을 ‘서잠실’, 광진구 자양동(잠실섬)을 ‘동잠실’로 불렀다. 나중에 설치된 서초구 잠원동은 신잠실로 불렸다. 이 곳의 지명이 잠실이 된 것도 여기에 뿌리가 있다.

    잠실섬에서는 세종 때부터 왕이 직접 관장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렀으며, 이로 인해 옛 지도에는 잠실섬을 상림(桑林)이라고 표시했다. 누에치는 사람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에 궁궐의 환관이 감독관으로 파견됐다. 양잠업이 쇠퇴한 건 조선 말기쯤으로 추정된다. 대신 뽕나무 묘목이 주요 수입원이 됐다.

    부리섬 부렴마을에 살았던 김창국(65)씨는 “할아버지 대에도 이곳에서 누에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고 한다”며 “대신 부렴마을 사람들이 많게는 수천평에서 적게는 수백평까지의 땅에 뽕나무 묘목을 길러 팔았다”고 말했다. 정작 잠실섬에 있는 새내마을과 잠실마을 사람들이 뽕나무를 재배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여름의 오이·참외 농사와 가을의 땅콩·배추·무 농사가 이들의 주수입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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