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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11.23(화) 18:42

대농들도 “앞날 불안”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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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발 이번에는…‘로또농사’
  • 후계농 지원자 해마다 줄어

  • 우루과이라운드10년-우리농촌은
    화정리 사람들


    <상>노인과 아이들
    <중>땅은 정직하다지만
    <하>떠난 사람 돌아오는 사람

    이곳 논산시 채운면 화정리는 ‘채운묵’으로 유명한 묵마을이었다. 주변에 깊은 산도 없고 상수리나무도 많지 않은데, 언제부턴가 마을 사람들은 묵을 만들어 강경 장터에 내다 팔았다. 40년 전 이 마을로 시집온 송윤규(68)씨는 “묵 팔아서 애들 가르치고 보릿고개도 넘겼으니 ‘장학금 묵’이쥬”라고 한다. 가마솥 하나 끓여야 몇십원 벌까 말까 했지만, 다섯 남매 학교 보내고 밥 굶지 않을 수 있어 고단한 줄 모르고 상수리 빻고 아궁이 불을 지폈다. 새마을운동 때는 ‘묵마을’로 지정돼 마을 들머리에 안내판도 세웠다.

    “쌀 개방 확대된다면…”
    100마지기 부농마저
    “자식에 대물림 안해”

    채운묵은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다. 현재는 송씨 등 두 집만 남았다. 묵 만들던 주민들이 떠나고 무허가 식품 제조로 단속을 맞아서였다. 송씨는 “그냥 용돈벌이라도 하게 놔뒀으면 좋겄어유”라며 묵가마를 휘휘 젓는다.

    250마지기(5만평, 1마지기는 200평) 농사를 짓는 김득중(57)씨는 마을 제일의 대농이다. 올 한해도 풍작을 거둬 무난하게 보냈다. 그런 그도 앞날은 알 수 없다. 벼 수매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데 내년에 농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논이 나왔다는데 사야 하는 건지, 아들 내외를 도회지로 내보내야 하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땅은 정직하지유, 땀 흘리는 만큼 돌아오니까유.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는 …, 모르겄어유.”


    △  ‘묵마을’ 화정리에서 마지막 남은 묵 제조자 송윤규(68)씨가 집 안에 설치한 가마를 젓고 있다. 논산/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근처 은진면이 고향인 김씨는 26년 전 갓 결혼한 아내와 경운기 한 대 달랑 끌고 이 마을로 이사왔다. 빈집에서 이슬을 피하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지난해에는 4천만원이 넘는 콤바인과 8천만원짜리 트랙터·이앙기·관리기에 벼 건조기까지 마련했다. “목숨 걸고 땅 파는디 정부는 휴경지 보상 신청하라고나 해대니 농사 지으려면 짓고 싫으면 하지 마라는 거잖아유. 지금도 싼 맛에 중국산들 사먹는디 쌀이라고 별 수 있겄슈.”

    그는 그래도 더 크게 농사를 짓고 싶어한다. 크게 해야 돈을 더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박원화(65)씨는 3년 전 농사일을 돕던 둘째아들(33)을 쫓아내듯 논산시로 내보냈다. 경작지도 150마지기에서 100마지기로 줄였다. 쌀시장마저 개방된다는 판에 농사로 구만리 같은 아들 인생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우리야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거 아니겄슈. 자식들한테까지 대물림해서야 ….” 그는 농협 다니는 맏아들도 이태 전 도시에 내보냈다.

    채운면 농가부채 104억…10년새 두배로
    재해로 논·밭 날리고 신용불량자 전락도
    소작농 도지주고 비료값 빼고나면 ‘빈손’

    10년 동안 화정리는 농민 양극화가 꽤 진행됐다. 전체 62가구 중에서 5가구가 마을 전체 경지의 절반 이상을 경작하고 있다. 모두 100마지기 이상 농사를 짓는 대농들이다. 나머지 가구들의 평균 경작면적은 대체로 20마지기가 되지 않는다. 10년 전에는 100마지기 이상이 두 집, 50마지기가 세 집이었다.

    화정리는 자연 재해가 잘 안 드는 고장이다. 그런 화정리도 우루과이라운드 출범을 전후한 90년대에 망가진 농민들이 많다. 90년대에는 유난히 바람 피해가 잦고 흉년이 자주 들었다. 흉작인 해는 병충해가 극성을 부려 농약값도 많이 들었다. 마지기당 두세 가마 수확에 그치는 경우도 있어 소작농의 경우 도지 주고 마지기당 한 가마 정도 들어가는 농약대 같은 것을 빼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자연히 땅은 ‘재수’가 좋거나 김득중씨처럼 ‘정말 열심히 농사짓는’ 농민들에 집중됐다.

    이상태(44·가명)씨는 그 와중에 논밭 다 날리고 국민 기초생활 보장 수급 대상자가 됐다. 태풍이나 폭우, 자연재해가 들 때마다 그의 비닐집은 피해를 입었다. 재기를 꿈꾸며 지은 축사는 불이 나 무너졌다. 주민들은 그를 두고 “똑같이 바람이 불고 비와 눈이 내리는데 왜 이씨네만 그렇게 피해를 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한다. 신용불량자가 된 이씨는 이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


    임분례(81)씨는 4년 전만 해도 15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혼자 몸으로 남편이 마련해 놓은 땅을 가꿔 딸 둘을 키우고 출가시킬 만큼 억척이었지만 손발이 다 쑤시고 기력도 예전 같지 않아 팔아치웠다. 혼자 사는 임씨는 일하지 않고 땅 판 돈을 생활비로 아껴쓰고 있다. 심심치 않게 친정을 찾는 딸들과 동네 또래 노인들을 만나며 소일을 한다.

    근처 양화리의 김승수(47)씨는 1987년 군대를 제대한 뒤 시설 부문 후계농업경영인(후계농)으로 지정받았다. 그는 채운면 후계농연합회 회장이다. 700만원을 저리로 대출받아 비닐하우스를 세워 의욕적으로 딸기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덕스런 농산물 시세와 흉작·풍작을 고생스럽게 넘나들면서 빚이 많이 늘어났다. 김씨는 몇 해 전부터는 시설 농업을 중단했다. 농사를 포기한 마을 노인들한테 땅을 빌려 마지기(300평)당 16만원의 도지를 줘가며 벼농사를 짓고 있다.

    “후계농들은 빚쟁이들이죠. 저도 빚이 2억원을 넘습니다. 후계농으로 지정받고 선진영농 한답시고 할 때만 해도 두 팔에 힘이 불끈불끈 들어갔죠. 그때 왜 후계농이 됐는지 ….”

    주병무 논산농협 채운지소 지점장은 “10년 전 정부가 공언한 ‘농기계 반값 공급 정책’이 농민들을 빚의 구렁텅이에 빠트렸다”며 “사람들이 농기계 값의 절반을 꿔주는 건데 반값에 파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지적한다. 기계화 영농만이 살 길이라는 말을 믿은 농민들은 고장난 농기계는 물론 좀 낡았다 싶은 농기계까지도 버리고 새 것으로 바꿨다. 광풍에 가까운 농기계 구입 바람이 일었다.

    최정묵(62)씨는 “농기계 사느라 대출받은 빚과 이자를 갚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유. 대출기간이 7년인디 무슨 기계가 3년만 지나면 고장이 나지, 도리 없이 새 기계를 사야 하고 또 빚을 내야 하지유”라고 했다. 요즘 나오는 호프식 콤바인은 대당 가격이 4천만원을 넘지만 연간 사용일수가 한 달 정도밖에 안 돼 대출금과 이자를 맞추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논산농협이 집계한 채운면 농가 부채는 94년에 55억원 정도 됐으나 10년 만인 지난해 말에는 104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김동식(73·가명)씨는 “영농자금 빌려 농사지었다가 흉년 만나면 못 갚고, 또 급한 대로 애들 교육비와 생활자금으로 쓰다 보니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고 한다. “지난번에는 땅 사는데 대출금을 아주 유용하게 썼다”면서도 “솔직히 농사가 잘돼도 혹시 총선이나 대선에서 빚을 줄여줄까 하는 생각으로 머뭇거리게 된다”고 했다. 그는 “주머니에 돈 있으면 꼭 쓸 일이 생기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빚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대농들도 앞날이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화정리 마을에서 50마지기 이상 농사를 짓고 있는 7명 가운데 가운데 40대는 김용태(48)씨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50대 후반 이상이다. 70대도 있다. 해마다 그들의 나이는 쌓인다. 그들이 삽을 놓을 때 그 삽을 다시 쥘 가족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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