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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5.05.09(월) 18:24

‘한국의 토론문화’ 를 토론한다


△ (왼쪽부터) 강치원 ‘원탁토론아카데미’ 대표(강원대 교수), 허경호 국제스피치토론연구소장(경희대 교수)



강치원 오지선다 ‘고르기’ 익숙 질문 꺼리는 사회

허경호 생각 다르면 적으로 ‘왕따’ 두려움 내재

민주주의는 그리스 아테네의 토론 광장에서 시작됐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구촌의 모든 나라들은 지금도 토론을 통해 원칙을 결정한다. 토론문화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전제 조건이자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재는 바로미터다. 오랜 세월 군사독재를 경험하고 이제 겨우 민주주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토론문화는 어디까지 왔나? <한겨레>는 그동안 토론문화의 정착·확산을 위해 3년째 진행해 온 ‘토론과 논쟁’면을 이번주로 마치면서, 한국의 토론문화를 돌아보고 가능성을 찾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원탁토론아카데미’ 대표인 강치원 교수(51·강원대)와 국제스피치토론연구소 소장인 허경호 교수(47·경희대)가 지난 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한국의 토론문화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한겨레> 토론 지면을 운영해 온 홍세화 기획위원이 진행자로 나섰다.

강 교수와 허 교수는 학교 안팎에서 ‘토론’을 주제로 강의하거나 다양한 토론회를 주재하면서 우리 사회의 토론문화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두 교수는 홍 기획위원을 만나자 “<한겨레>에서 앞으로 ‘토론과 논쟁’을 읽을 수 없게 된다니 서운하다”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홍세화 기획위원=우선 저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토론의 중요성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토론이란 게 개인의 가치관과 의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거든요. 현재 우리 사회 토론문화가 어느 정도 성숙되어 있는지 점검해보고, 미성숙한 토론문화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얘기해 봅시다.

강치원 교수 =<한겨레> ‘토론과 논쟁’ 지면이 이번을 끝으로 중단된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홍 위원님이 그동안 ‘토론과 논쟁’과 ‘마주보기’를 운영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들려주시면 오늘 우리의 논의가 보다 쉬워질 것 같습니다.

=‘마주보기’를 할 상대와 토론자를 섭외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딪치기를 피하려고 해요. 우리 사회는 토론, 즉 다른 견해를 주고받겠다는 자세가 부족하단 뜻이죠. 또 마주보기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한 ‘부딪침’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2개 지면을 할애했는데도 견해가 다름이 오롯이 드러나지 못하다 보니 독자들이 지면을 통해 대담이나 토론을 읽는 데에 피곤함과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허경호 교수=대담자나 토론자가 어떤 견해의 지지자로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각인되면 ‘후폭풍’이 생기게 되고 이걸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홍 위원님이 마주볼 사람, 토론할 사람을 찾는데 애를 먹은 것도 이런 부담감 탓이 있었을 겁니다. 우리 사회는 ‘다름’을 보는 시각 자체가 너무 짧아요.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기 사고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이 좀 다르면 미움·경계심·증오와 같은 감정이 생기는 거죠. 과거 군사정권 때의 문화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독재자의 시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단자로 낙인찍혀 버리죠. 현재 우리 사회 저변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면 ‘주류에서 벗어난다’든지 ‘왕따당한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어요. 사고가 자유롭다는 대학생들 조차도 자기 주장을 말할 때 당당하지 못하고 남의 눈치를 보더라고요. 다름과 차이에 대한 인식·가치관이 편향되어 있다는 얘깁니다. 최근 독도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있다면,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왜 일본사람이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면 체계적으로 반박을 해야하는데, 무조건 ‘저쪽은 적이니 이야기 들어볼 것도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강/ 진리의 섬광은 이견 충돌때 나와
필요한 것은 공정한 절차와 형식

=토론의 정신은 다름을 인정하고 같음을 지향하는 것, 여럿을 간파하고 하나를 지향하는 것, 부분을 존중하고 전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창조성, 혹은 주체성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이 전제될 때 가능합니다. 전자는 개인주의 또는 자유를, 후자는 사회주의 또는 평등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서로 보완되지 않으면 시장주의나 영웅주의, 그리고 전체주의로 흐를 염려가 있습니다. 요컨대 창조적 공동체 사회를 이루어 내는 것이 토론이고, 그 전제도 역시 토론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겨레> ‘토론과 논쟁’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진 지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반인, 시민의 눈높이에 맞는 의제 설정과 진행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고민을 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대통령 선거때 결선투표 직전에 벌이는 방송토론회가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던 적이 있어요.

그만큼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의식을 형성하는데 토론이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토론을 통해 자기 가치관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부족하고, 토론에 대해 열린 자세도 갖춰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려운 과제입니다.

=토론을 통해 누군가에게 자극받아 생각이 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토론은 변화의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변화의 주체는 어쨌든 자기자신입니다. 저는, 토론이 상품 광고처럼 지나치게 누구를 설득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토론자나 청중이 비판적 사고력을 가지고, 여러가지 정황을 읽고 판단해 열린 마음을 갖고 스스로 변화하는 게 토론입니다. 방송 토론을 본 시청자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 ‘왜 결론도 안나는 얘기를 저렇게 끝까지 하고 있냐’는 거예요. 이건 토론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고 토론문화가 일천하기 때문에 나오는 소립니다. 토론에서 결론이란 없습니다. 토론으로 꼭 결론을 만들고 변화를 이뤄내야 할 필요는 없어요. 결론이 나지 않아도 토론 전과 토론 후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기니까요.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하고, 공론의 장에서 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만 해도 성공한 토론이에요. 결론을 내려야만 생산성 있는 토론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토론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식을 생산하는 창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의 섬광은 서로 다른 견해가 부딪칠 때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제대로 경청하고 그것이 내가 하고자 말과 부딪쳐 스파크가 날 때 ‘진리의 섬광’이 보이는 거죠.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는, 결론에 이르지 않더라도 토론을 통해 의견의 차이를 제대로 드러내준다면, 즉 의견의 불일치 지점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면, 또 토론을 지켜본 제3자가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다면 잘 된 토론입니다. 그러나 이나마도 안 되는 토론이 허다하거든요.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너무 단단히 굳어버린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어야 해요. 이게 교육과정에서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채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고, 스스로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하니 토론 자체에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거에요. 뭔가 자기 견해를 밝히고 싶을 때는 인터넷 공간으로 가서 일종의 ‘발설행위’를 합니다. 익명의 뒤에 숨어 욕설을 해대고 ….

허/ 토론으로 결론 보려는 생각 버려야
다양한 견해 인정만으로 성공한 것

=우리가 ‘열린 자세’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일제시대를 겪고 한국전쟁, 이념대치,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말 많으면 공산당이다 …’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의 민주화 운동,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상당히 열린 사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긴 합니다. 조금씩 문화가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시각이 대립하고 마음을 열지 않는 면이 있어요. 최근의 일본관이나 독도문제라든지 이라크 파병, 광주항쟁, 미국, 서울대학교를 위시한 대학서열화 등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 시각의 첨예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죠. 하지만 오늘날의 폐쇄성은 예전의 강압적 대치와 달리 자발적 대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하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공정한 절차와 형식입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한자리에 불러 토론하도록 하려면 공정한 절차와 형식, 공정한 사회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나아가 의제 설정부터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진정한 토론이 가능한데, 의제설정의 공정성이란 주체적 참여를 의미합니다.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통용이 되고, 반면 공공성에 대한 인식은 자라지 못한 상태예요. 그리고 일제시대와 분단을 지나오면서 ‘나와 다름’을 서로 부정하기만 해온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민주와 반민주, 민주와 독재는 서로를 끝없이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 거죠. 사람들의 의식은 어렸을 때 독서와 토론, 자기 성찰이 아닌, ‘이데올로기 주입’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주입된 의식을 마치 자기 것인 양 고집하고 있고요. 최근에는 한국사회에 ‘물신주의’까지 퍼져 아주 큰 문젭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따면, ‘존재냐 소유냐’의 질문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소유만 중요시하고 존재는 잊어버린 겁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열린 가치관이 생기는데, 이제는 ‘돈만 벌자’로 가고 있습니다.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죠.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요새 ‘10억 만들기’가 유행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 논리를 갖추려는 모색이 설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보기도 합니다. 바로 ‘네티즌의 힘’이죠. 노무현 정부의 탄생, 월드컵 열기, 탄핵을 뒤집은 것 등을 보면, 젊은이들이 꼭 그렇게 아무런 생각없이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문을 열어놓고 있거든요. 얼마전 보도를 보니까, 요즘 대학생들의 58%가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미국을 꼽았더라고요. 이건 무슨 전교조 교사가 학생들에게 주입해서 나온 게 아닙니다. 옛날과는 엄청나게 달라진 거죠. 왜곡된 입시제도 아래서 교육을 받았지만,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양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고 전파하면서 생긴 변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넷이란 게 부정적 측면이 분명 있긴 하지만, 오히려 이 공간을 적극 토론문화 정착을 위한 장으로 키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만큼 인프라가 잘 갖춰지고 사용자가 많은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또 일부에선 인터넷 문화를 ‘쓰레기’라고 하는데 그건 좀 단면적 시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문화라는 게 겨우 10년도 안된 것 아닙니까? 이제 시작이에요. 지금부터 초등학생들에게 토론을 본격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라야 자연스럽게 네티즌십, 즉 ‘네티켓’을 갖게 돼요. 우리 사회, 공공기관·단체가 좀더 사명의식을 갖고 네티즌들에게 건전한 토론문화를 교육시키고, 익명이 아닌 실명을 쓰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인터넷 문화를 자꾸 ‘쓰레기 문화’라고만 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입니다. 역동적이고 빠른 네티즌들이 토론문화를 창조하고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강치원
감정 앞서는 한국인 기질도 걸림돌
누리꾼 댓글문화 밖으로 끌어내야

=한국 사회의 토론문화가 풀어야 할 어려움들을 말씀하셨는데,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한국인들의 감정적 기질입니다.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토론을 쉽게 시작하지 못합니다. 토론이 한번 붙으면 감정이 격해져서 금방 욕설을 하거나 비방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다 또 금방 식어버리죠. 이른바 ‘냄비근성’이에요. 미국이 외교 협상을 할 때 일본사람보다 쉬운 상대가 한국사람이란 말도 나옵니다. 감정이 올라오면 쉽게 속을 펼쳐보인다는 겁니다. 토론은 이성과 감정의 조화입니다. 토론을 활성화한다는 것은 한국사람의 감정과 이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 문제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리 인터넷 토론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리플 문화’라고 봐요. 리플 문화는 한국의 독창적인 문화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그동안 닫힌 사회에 살다보니 참여의 기회가 없었고, 그래서 온라인이란 공간을 통해 사회문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티즌들은 리플을 다는 것으로서 개인적 주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긍정적 효과가 있습니다. 반면 개인주의에 빠지거나 어떤 현상에 대해 전체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또 익명성으로 인해 진정한 토론문화라 볼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긍정적 부정적 양면성이 있는 인터넷 문화를 현실의 토론문화와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리플 문화를 오프라인으로 끌고 나와 바람직한 토론문화로 바꾸려는 노력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두 교수는 한국사회의 토론문화가 전반적으로 일천하다는 점엔 동의하면서도 가능성과 잠재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예컨대 강 교수는 ‘원탁토론’이라는 토론 운영 방식에 자신감을 내비쳤고, 허 교수는 젊은 네티즌들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홍 기획위원에게는 <한겨레>가 앞으로도 다른 지면을 통해 토론문화를 계속 이끌어갈것을 주문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탈정치화’ 되어 있습니다. 냉소적이에요. 탈정치화와 정치 혐오를 자랑스럽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탈정치도 정치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걸 알아야 하거든요. 손오공이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겁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탈정치 역시 정치의 한 모습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토론문화의 가능성을 찾을지 걱정입니다.

=토론문화 개선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입니다. 교육은 크게 네 가지 과정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연구·교수(티칭)·학습·평가가 그것입니다. 우리 교육에서 문제가 되는 게 이 과정이 각각 분리되어 있다는 겁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지만 평가는 오엠아르 카드가 합니다. 한 사회의 교육 평가 시스템의 수준은 그 나라의 대학입시제도가 핵심입니다. 그리고 교수·교수 양성방식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입시에서도 오지선다형으로 오엠아르 카드가 평가합니다. 교사를 뽑을 때도 그렇고 고급 공무원을 뽑을 때도 그렇습니다. 독일에선 초등학교에서 대학을 거쳐 사회에 나갈 때까지 사람을 평가할 때 ‘고르기’란 아예 없습니다. 주관식·단답형이나 약술형·서술형·구술형으로 하는 거죠. 우리는 사람을 뽑는 거의 모든 과정이 오지선다형입니다. 주관식·단답형·서술형·구술형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쪽으로 가야하고 이게 바로 토론문화와 직결된다고 봅니다. 교육의 분리된 4가지 과정을 연결시키는 고리는 토론입니다. 토론식으로 연구하고, 토론식으로 교수(티칭)하고, 토론식으로 평가해야 돼요. 그것은 가르친 사람이 평가할 때 가능합니다.

허경호
토론 없는 기업은 생산성 기대 못해
방송토론 한계 인쇄매체가 채워주길

=‘토론문화’ 하면 그 상징이요 전형의 공간이 국회죠. 그런데 사실 초등학생이든 어른이든 ‘국회’ 하면 떠오르는 것이 싸움이요 드잡이입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우리 토론문화 수준을 알 수 있는 겁니다. 토론을 통해 생산성을 지향하고 그 결과물을 내놓아야 할 국회가 비생산적 토론의 전형으로 비치는 건 정말이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어요. 미디어의 문제도 있습니다. 언제나 미디어는 국회가 잘 굴러가는 것보다는 드잡이하는 모습, 갈등에만 초점을 맞춰 왔으니까요. 해결책은 의사진행의 규정을 합리적으로 바꾸고 원칙과 룰을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국회의원들 스스로도 남의 토론을 음미하고 생산적인 토론을 벌일 역량이 있는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기업의 토론문화도 한번 짚고 가야겠습니다. 보통 기업문화라고 하면 ‘왕회장’이나 ‘제왕적 총수’의 이미지를 떠올리죠. 이런 문화 속에서 총수가 비전을 만들어서 밀어붙이면 되지 토론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기업 문화도 토론문화 쪽으로 가야합니다. 기업이든 어떤 공동체든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한 용인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기업·공동체 구성원의 만족도는 낮아집니다. 특히 생산성과 관련된 아이디어는 토론을 통해 나올 수 있습니다.

=<한겨레> 토론 지면 중에 ‘왜냐면’이란 것도 있죠? 저는 어린 자녀들에게 던질 수 있는 최고의 질문이 ‘왜냐면’이라고 생각해요. 하나 더 있다면, ‘예를 들면 뭐가 있을까’란 질문이고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 이런 질문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냥 ‘오지선다형’이에요. 질문할 시간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학생이 질문을 하면 진도를 나갈 수 없으니 아예 질문을 하지도, 받지도 않아요. 질문하지 않는 사회, 질문을 싫어하는 사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대학생들의 탈정치화를 말씀하셨는데, 자기 주체성이 망각되어가는 현상이고, 질문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잘 던졌고, 공자는 답변을 잘 하였습니다. 한국사회의 토론문화를 말할 때 국회와 법정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한국 국회는 토론 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국회가 소위원회나 상임위 중심이 아닌 본회의 중심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본회의의 일방적 연설 중심이 아니라 소위원회 상임위 중심으로 운영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아울러 선거에서 후보 토론회를 활성화는 것도 절실합니다. 법정 토론에 관해서는, 우리 법정은 토론을 못해도 재판이 벌어지는 구조예요. 판사가 검사와 변호사의 토론을 듣지 않고 혼자 조서의 서류만 보고 일도단칼에 용단을 내리는 식의 재판 방식입니다. 참심제나 배심제와는 거리가 먼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변호사가 “말 잘 못해도 돈 잘 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잖습니까? 요즘 사법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공판중심주의와 검찰수사권 등 논란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법정 토론문화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3개 지상파 방송이 모두 토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송 토론을 보면 방송사가 지나치게 시청률을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쟁점에 대해 심도있는 이해를 주기 보다는, 갈등을 부추기는 쪽으로 토론을 끌고 가는 게 아니냐는 냄새가 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토론을 진행하고 시청률도 높여야 하는 방송의 구조는 이해합니다만, 시청자는 토론에서의 발언이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할 위험도 있거든요. 사실 방송 토론에서는 어떤 주제에 대해 제한된 시간에 극히 일부만을 다루게 되고, 그래서 핵심에서 비켜갈 수도 있고 피상적일 수도 있습니다. 생방송이라는 특성 때문에 피상적 분제를 본질인 양 오도하기도 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흘러 토론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기도 하죠. 그래서 이런 부분을 인쇄매체가 해야합니다. 신문같은 인쇄매체는 좀더 짜임새있는 토론을 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 토론회에서는 미리 쟁점을 주고 양쪽이 똑같이 토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이게 안되면 토론자들이 활용하는 용어가 다르고 이야기 전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두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펼쳐실질적인 논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토론자들이 어떤 부분에서 충돌하는지 드러나지 않게 되죠. 토론의 ‘묘미’라는 것이, 이쪽에서 논리를 제기하면 저쪽에서 촘촘한 반론을 가하는 것인데, 이런 묘미가 나타나지 않으면 시청자나 독자는 지루해집니다.

=저는 우리나라 방송사들이 토론문화 확산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주변에 물어보면 사람들이 토론 프로를 그렇게 많이 보지 않더라고요. 방송이 토론의 모범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개선할 것이냐? 우선 저는 방송사 피디와 기자의 월급 등 소득수준이 너무 높아 일반 서민의 계층적 수준과 좀 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진정한 참여 프로를 만들려면 리플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토론 진행과정과 의제설정에 청중과 시민들이 보다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전문성과 대표성이 있는 패널 토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각적인 노력으로서 외부인사로 구성되는 시청자위원회 등을 활성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로 진행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패널 토론자들이 상대가 말하는 중에 말허리를 자르고 끼어들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 말을 경청하지 않고 비아냥거리기 등을 극복해야 합니다. 공정하고 유익하고 재미있는 토론을 위해 진행의 형식과 절차와 방법에 대한 보다 다양한 차원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참다운 토론문화를 위해서는 토론의 개념이 논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토론은 일차적으로 대외적 논쟁을 의미합니다만, 나아가서 대화와 구별되는 공식적 절차적 소통으로서 대내적 토의까지를 포함합니다. 더 크게는 비공식적 비절차적 소통으로서 대화까지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토의에서 논쟁을 거쳐 토의’로 나아가는 토론이 좋은 토론입니다.

정리 김성재 기자 seong68@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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