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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4.19(월) 21:03

칸트와 헤겔 사이 피히테 민족공동체 정치철학 집착


피히테(1762~1814)는 칸트주의자를 자처했고 “실체로부터 출발해 개별적 인간에 도달하고자 하는 교조주의자” 스피노자를 비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물자체와 현상계의 분리, 오성과 이성의 구분 등에서 칸트에 동의하지 않았다. 피히테는 인식의 가능 조건과 인식 능력 자체를 구분하는 칸트의 입장을 비판했고, 칸트 특유의 ‘관점이원론’을 “활동하는 이성” 속에 해소하고 단일화하고자 했다. 그는 칸트가 자유와 필연의 이율배반을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또 다른 수준에서 반복했을 뿐이라고 봤다.

피히테는 칸트에게서는 단지 소극적으로 ‘우발성’으로서 처리될 뿐인 오성의 활동을 칸트로부터 물려받은 ‘선험철학’에 근거해 해명하고자 했다. 그 결과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아는 자아가 아닌 것에 자신을 대립시킨다” “자아는 자아가 아닌 것의 부분에 자신의 부분을 대립시킨다”는 세 가지 근본원칙을 끌어낸다. 피히테에게서 아와 타의 관계는-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인식의 가능조건으로서 파악되고, 이는 사유에 전제되어 있는 사회관계적 지평이 이제 사유의 대상 자체로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피히테는 분명히 칸트로부터 헤겔로의 길을 열고 있다.

철학적 업적만을 근거로 평가한다면, 피히테는 칸트와 헤겔의 중간지점 이상의 독자적인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사상가 또는 저술가로서 그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근대의 태생적 문제인 보편적 시민사회와 특수한 민족공동체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독일민족에게 하는 연설>에서 피히테는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과 집정관에 머무르며 공화정체를 형식적으로나마 유지시켰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를 대비시킨다. 피히테는 독일 민족은 스스로 근대 국가를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외부로부터의 모든 종류의 개입에 반대한다. 이를 위해 시급히 교육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한다. 이와 같은 배타주의는 아와 타의 구분, ‘독일’과 ‘외국’의 구분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그는 라이프니츠, 루터, 칸트 등 독일 태생의 사상가와 스피노자와 같은 “외국 철학”을 대비하고 후자를 “경솔함”과 “깊이 없음”으로 특징짓는다. 피히테의 구별이 철저히 태생에만 근거한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피히테의 정치사상에서 보편적 개인, 권리, 자율성 등에 기초하는 근대 정치철학의 민족주의적, 특수주의적 도착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홉스로부터 칸트까지의 전통으로부터 피히테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자연법의 기초>에서 그는 근대적 사회계약론의 보편주의적, 이성주의적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사회계약을 통해 구성될 국가는 생산자, 상인, 공장주, 관료로 이루어진 <폐쇄적 상업국가>, 국가적 계획에 의한 복지국가, 배타적인 자주경제로 나타난다. 그래서 피히테의 정치철학은 정당화 대상과 정당화 담론의 균열을 보여 주는데, 아마도 근대 국가가 이념적으로는 보편적 개인주의에 근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특수한 민족정체성에 기초해 수립됐다는 점에 닿아 있을 것이다.

금민/사회비판아카데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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