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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2.07.28(일)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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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은 끝났는가 / 정경희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조카 단종(재위 1453~1455)을 밀어냈을 때 우의정 정분(~1454)은 체찰사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충주에서 황보인·김종서 등 사육신의 머리를 효시하는 것을 보고 용안역에 이르렀을 때 한 관원이 말을 달려 오며 “전지가 있소”라고 외쳤다.

정분은 죽음을 각오하고 말에서 내려 “노상에서 형을 받을 수는 없으니, 역관으로 갈 수 없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관원은 “공이 귀양갈 전라도 낙안으로 압송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분은 낙안까지 가는 10여일 동안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낙안에 도착했을 때 “수고했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연려실기술). 그는 낙안에서 처형됐다.

이처럼 죽음을 앞두고도 태연하게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나라에서는 품위와는 담을 쌓은 저질의 말이 너무 흔하다.

“오늘날 미국에는 지식인은 없고 `명사’만 있다”는 것은 앨런 블룸교수(시카고대학·철학)의 말이었다. 누구나 텔레비전을 보기만 하면 15분 안에 배울 수 있는 거친 말과, 서푼짜리 싸구려 철학을 말한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한국을 예견한 것처럼 들린다.

정권교체 이후 이 나라의 정치판은 저질의 욕설판이 됐다. 그러더니 지난 23일에는 한나라당의 이규택 총무가 민주당을 가리켜 “빨치산 집단 같은 느낌”이라는 극단적인 막말을 했다.

이 총무가 “발언 잘못으로 국회가 열리지 못한 데 대해 유감”이라고 사과하고, 서청원 대표도 “국민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해서 소동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당을 `빨치산 집단’에 빗댄 이날의 발언이 우연히 터진 단발성의 사고는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것은 6·15공동성명 이후 한나라당이 끊임없이 제기해온 색깔시비와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북의 2중대’(김용갑 의원)라던가, `북의 홍위병’(박승국 의원)이라던가, 사학법 개정안에서 `사회협약을 통한 고통분담’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김만제 의원) 딱지를 붙였다던가, `좌파’로 몬 일련의 색깔시비가 그것이다. 사실상 `빨갱이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6·15공동성명이 김대중 정부와 클린턴 미국 정부의 공조로 이룩해낸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만으로, 또는 클린턴 대통령의 포용정책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이 있기 전인 1999년 미국의 페리 조정관이 평양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 6·15공동성명의 큰 원칙은 이때 합의를 보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그에 앞서 북과의 수교에 합의했던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이 `먼저 남북대화’를 요구하고, 독일도 “남북대화부터 하라”고 해서 북의 백남순 외무상을 문전박대 했었다. 미국의 막강한 외교망을 통해 범세계적인 공조체제가 가동됐던 것이다.

또한 6·15공동성명은 범세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 `북의 2중대’가 아닌 사람이 있다면 대한민국땅의 한나라당에 속한 사람들밖에 없다는 우스꽝스런 결론이 나온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대통령의 독점적인 영역이 아니다. 국무부·국방부의 직업관료집단, 의회, 그리고 여론이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얻어지는 타협의 산물이다.

북에서 요도호납치 적군파가 일본귀국 의사를 밝히고, 시장경제원리를 실험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북·미 사이에 물밑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움직임일 수도 있다.

북쪽에게 서해교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데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악의 축’ 한마디로 햇볕·포용정책이 끝난 것은 아니다. 6·15공동성명은 범세계적인 공조·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기억해 둬야 할 것이다.

정경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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