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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4.29(목) 18:30

고속철보도, 잠재적 위험 부각 게을러


“오늘날의 문명은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에서 이전 문명들과 구분된다. 속도라는 특징이 그것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의 말이다. 그런데 역시 프랑스인이었던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이 말에 흥미로운 토를 달아놓았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의 문명에 두 번째 특징을 가져왔다. 사건이라는 특징을. 범선이나 증기선을 발명한다는 것은 곧 난파를 발명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차의 발명은 탈선의 발명이며, 자가용의 발명은 고속도로상에서 벌어지는 연쇄 충돌의 발명이고,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비행기나 기구)를 날게 만든다는 것은 추락의 발명이다”(<미지수>, 2003).

다소 과장됐을지언정 비릴리오의 지적에 수긍할 수 있다면, 열차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열차의 등장은 논리적으로 열차사고를 수반할 수밖에 없을 테니. 따라서 열차사고 소식에 정작 놀라고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 사고 탓에 생긴 엄청난 피해(특히 인명 피해)일 것이며,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도 열차사고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가 아니라(완전히 없앨 수도 없다) 어떻게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난 일주일간 <한겨레>가 북한 용천역 열차폭발 사고를 크게 보도한 기사들을 보며 좀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사실 그 기사들 자체는 별 문제가 없다. 정작 문제는 교통수단들과 관련된 그런 대형사고들에 대해 그동안 한겨레가 보여준 홀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겨레가 그런 대형사고들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한겨레라면 그런 대형사고들이 발생하기 이전에 교통수단 안전문제를 공론화되어야 할 의제로 설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동안 한겨레에 실린 고속철도 관련기사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고속철도가 개통된 4월1일 이전의 한 달(3월2일~4월1일) 동안 한겨레는 고속철도 안전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은 채 여타 신문들처럼 장밋빛 미래만을 그렸다(대표적으로 3월25일 7면 ‘시속 300km 질주…“삶의 지도” 바뀐다’ 3월26일 37면 ‘부산으로 목포로 고속철 타고 하루나들이’를 보라). 더욱이 고속철도 개통 이후 잦은 고장, 연착, 환승체계 미비, 매표 혼란, 역방향 좌석문제, 자기장 기준초과 등이 불거진 뒤에도 이를 단순보도했을 뿐 후속보도가 이어지거나 심층보도가 이뤄지지 않았다.

용천역 열차와 고속철도의 차이점은 사고가 일어났느냐 안 났느냐이다. 혹시 한겨레는 “고속철도는 절대 안전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믿는 것일까 그렇지만 지난 1998년 독일고속철 이체(ICE)가 충돌사고를 일으켜 1백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속철도가 절대 안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한겨레는 지금의 고속철도 관련 문제가 대형사고로 이어지기에는 미미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형사고가 일어나야만 고속철도 안전 문제를 다룰 생각이 아니라면, “생활과 산업 모두에서 속도혁명의 다양한 혜택을 줄 것”(고건 총리)이라는 고속철도의 잠재적 위험도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1995년 대구 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사고 때 그토록 안전문제를 떠들었는데도 10년도 안 되어 같은 곳에서 대형참사가 빚어지는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고속철도가 개통된 4월1일 전후는 대통령 탄핵과 총선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할 때였다. 이 기간에 한겨레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정치적 의제설정을 부각시킨 노력은 박수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공론화되어야 할 의제는 정치 분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속철도 안전 문제처럼 일상 생활과 맞닿는 여러 폭넓은 분야에서까지 다양한 의제를 설정할 수 있을 때 한겨레는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언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잠재적 사고가 현실화된 뒤 ‘철도 관계자들의 안전불감증’ 운운하며 뒤늦게 호들갑 떨거나 정색하는 것도 언론으로서 너무 낯간지러운 일 아닌가.

이재원/도서출판 이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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